조선 개국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꿔 놓은 태조 이성계. 그의 말년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자식들의 골육상잔으로 편하지 못했습니다. ‘1차 왕자의 난’ 직후 홀연히 한양을 떠나 잠시 마음의 평안을 얻었던 곳이 동두천시(東豆川市)에 있는 소요산 자락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약 8개월 간 머문 후 양주에 있는 회암사로 떠났는데, 산 입구에 ‘이태조 행궁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군사 요충지
동두천은 고구려의 남진이 본격화되던 4세기 말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이에 백제는 북으로 고구려를 경계하고 남으로 신라를 방어하기 위해 소요산성을 세웠고, 고구려는 ‘내을매현’을 설치했습니다. 6·25전쟁 당시에도 치열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북한 주군이 투입됐던 3번 국도를 국군 제7사단이 지켜 오늘의 동두천을 있게 했습니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삶의 터전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 땅이었으나, 475년 고구려에 예속됐습니다. 757년 신라 영토일 때 포천에 속했다가 고려시대 양주로 편입됐습니다. 6·25전쟁 직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해 1963년에 ‘양주군 동두천읍’이 됐고, 이후 1981년 동두천시로 승격됐습니다.
명소가 품은 이야기를 듣다
거센 비바람이 치던 밤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초막의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습니다. 비바람을 피하게 해 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정좌하고 명상하던 원효대사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설법으로 유혹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곳에 암자를 세우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뜻대로 한곳’이라는 뜻으로 ‘자재암’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소요산 기슭에 있는 자재암 일대에는 그가 번뇌와 싸우며 수행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새로운 비상을 꿈꾸는 도시, 동두천
• 자재암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화재로 소실돼 6 · 25전쟁 이후 복원됐습니다. 원효대사가 머물며 수행했던 곳답게 일대에 그의 흔적이 빼곡합니다. 원효대, 원효샘, 원효폭포를 비롯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요석공주 별궁지 등이 남아 있습니다.
• 탑동 석불
고려시대 말기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대 높이는 130cm이고, 대좌에 연화문 조각이 선명합니다. 원래는 삼층석탑과 함께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때 유실된 것으로 전해지고, 조선시대 초기에 폐사된 양주 회암사지의 아홉 암자 중 하나라는 설이 있습니다. 1986년에 동두천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됐습니다.
• 자유수호평화박물관
6 · 25전쟁의 참상과 UN참전용사의 고귀한 희생을 알리기 위해 2002년 건립했습니다. 총 4층 규모로 6 · 25전쟁기록관, UN참전국전시관, 전쟁기록영화상영관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6 · 25전쟁 당시 나라를 지켰던 호국영령들의 값진 희생과 UN참전용사의 아름다운 투혼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캠프보산
미2사단 ‘캠프케이시’ 맞은편에 조성된 미군 전용 상가지구로, 거리는 200여m입니다. 미군 대부분이 평택으로 옮겨가면서 침체에 빠졌던 이곳을 재생해 ‘캠프보산’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상가 벽마다 화려한 그래피티 벽화가 그려졌고, 낡은 점포 사이로 아기자기한 예술 공방이 들어섰습니다. 2017년에는 두드림뮤직센터가 개관돼 특구의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