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유용
2018년 8월 기준, 제주국제도시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 1만 5,265명, 이들 중 제주도민들이 꼽은 유명인사 중 한 명이 바로 아일랜드 출신의 패트릭 J. 맥그린치 신부다. 그의 한국 이름은 임피제.
지난 1928년 아일랜드에서 수의사 아버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임피제 신부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제주 땅을 처음 밟았다. 앞서 한 해 전인 1953년, 강원도에서는 골롬반선교회 신부 7명이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피제 신부는 이들을 대신할 5명의 사제 중 한 명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다섯. 그때만 해도 제주도는 폐허 그 자체였다. 한국전쟁과 4·3사건의 여파로 수많은 아이들이 기아에 허덕였고, 가난의 냄새가 사방으로 풀풀 날렸다. 제주도는 섬 전체가 곤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임피제 신부는 이러한 현실을 보며 제주도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선교가 아니었다. 그는 ‘선교보다 먹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주민들을 위한 소규모 금융기관 즉, 신용협동조합 설립에 힘을 쏟았다.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려던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무언가를 팔아야만 농사를 지을 돈을 마련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유는 제주도에는 일자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기반이 없는 제주도의 청년들은 어부가 되거나 ‘육지 취업’을 떠났다. 이때 부산의 한 공장에 취업했던 한 십 대 여성이 원인 불명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피제 신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에 일자리를 만들 결심을 했다. 1959년, 밖에서는 돼지를 치고 안에서는 옷을 만들었다. 아일랜드 수녀들이 아낙네들에게 방직기술을 가르쳤다. 스웨터를 짜 육지에 파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는 1959년 한림수직 설립의 근간이 됐다.
이후 1961년 지금의 성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양과 돼지, 소를 키우는 목장 사업이 시작됐다. 임피제 신부는 육지로 나가 암퇘지를 사들였고, 이를 도민들에게 나눠주며 아시아 최대 양돈목장 이시돌 목장을 세웠다. 그가 ‘푸른 눈의 돼지 신부님’으로 불리게 된 이유다.
그의 헌신은 한결같았다. 그는 60년 넘게 제주도에 살며 한 평생 도민들을 위해 헌신했다.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일으켰고 성이시돌의원, 양로원, 호스피스 병원, 청소년센터, 피정의 집, 수녀원 등을 설립했다. 한라산 중턱 산간을 경작해 새로운 농업 기술을 전파했다. 그는 2014년 아일랜드 대통령상 수상자로 선정됐기도 했다.
임피제 신부는 제주도의 첫인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타인에게 퉁명스러웠지만 은근한 인심이 가득하다고. “제주도민들은 머나 먼 타국 땅에 온 선교사를 굶기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2018년 4월 23일까지 이어졌다. 임피제 신부는 제주도민들으로 위해 64년을 헌신한 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제주 땅에서 영면에 들었다. 향년 90세의 나이. 그는 이제 제주도민들에게 ‘제주도 근대화의 선구자’로 불리고 있다.
“고인께서는 4·3사건과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제주도에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성이시돌 목장을 설립하여 제주의 가난을 떨쳐내고자 하셨고, 병원, 요양원, 유치원 등 복지시설과 신용협동조합을 세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중략)
“신부님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포용, 나눔의 메시지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이어가겠습니다. 故 맥그린치 임피제 신부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 2018년 4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전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