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봉은사에 곧 들어설 이 사천왕은 완성 후에는 그 무게가 1톤밖에 되지 않는다. 6톤이 그의 손에 의해 깎여 나간다. 1톤의 사천왕이 웅장함을 갖추기 위해서는 6톤의 피와 땀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글 강나은•사진 김희진
젊었을 때, 패기 넘치던 목조각장은 무엇을 만들든 자신감에 차 있었다. 다른 이들 역시 그의 작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니 그의 자신감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먹고살기 위해 목조각을 해 온 지 어느덧 50여 년이 다 돼 가는 지금, 경기 무형문화재가 된 한봉석 목조각장은 양손을 밴드로 감싸고, 어깨는 물리치료를 받으며 작업을 해야 한다.
한때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하던 자신감은 작품에 대한 부끄러움을 키웠지만, 목조각 작업을 향한 애정은 더욱 깊어졌다.“칼질을 할 때마다 떨어지는 나뭇조각을 ‘칼밥’이라고 해요. 그렇게 칼밥이 ‘삭삭’ 나올 때, 망치 소리가 ‘땅땅’ 날 때 가장 기분이 좋아요. 내가 작품을 만든 후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좋아요.
게다가 이제 손에 익은 작업도구들을 보면 끝부분이 다 뭉개져 있어요. 이것을 우리끼리는 ‘꽃이 폈다’고 표현하거든요. 세월이 가면 갈수록 꽃핀 작업도구들이 많아지는 것이 조각의 낙이죠.”
게다가 배움의 즐거움이 겹쳐지면서 작품 활동은 더욱 날개를 달았다. 어렸을 때 학업을 미처 마치지 못한 그는 검정고시에 합격하며 뒤늦게 불교미술을 본격적으로 배워 보고자 나섰다.
동국대 평생교육원에서 불교미술을 배운 뒤 대학에 들어가 전통 도예를 익혔다. 대학까지 마치면 해소될 것 같았던 배움에 대한 갈증은 배울수록 더욱 심해졌고, 그는 현재 석사 졸업 후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장인(匠人)도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그 시간에 일을 해서 돈을 벌겠다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제 작품도 조금씩 달라져요.”여기서 더 나아가 이제 그는 학자와 장인 간의 교류를 위한 마중물 역할도 해 나가고 있다.“장인이면서 학문을 이해하는 사람이 필요해요. 아는 것이 많아야 충실히 작품에 반영할 수 있으니까요.
또 실무자가 논문을 쓴 경우가 없기 때문에 기존에 학문적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아요. 이것도 바로 잡아야 하죠. 이렇게 하다 보면 저보다 작품 활동도 열심히 하고 이론도 더 많이 배운 친구가 나오지 않을까요?”
배움도 배움이지만 그는 누구보다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2017년에는 오대선 북대미륵암 영산전 오백나한탱을 완성했다.
오대산의 배경부터 시작해 오백나한까지 세밀하게 조각한 작품으로, 총 제작기간이 4년에 이른다. 그는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 대통령상은 물론 여러 차례 불교미술대전에서 상을 거머쥐며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또한 한봉석 목조각장은 2010년부터 문화재 재현을 시작했다. 국내 문화재 재현으로 시작된 이 일은 해외반출문화재 재현으로 이어졌다. 그는 15명의 작가들을 모아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의 전승 작가 모임인 ‘나우회’를 결성했고,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직접 살펴보고 재현했다. 이러한 활동이 문화재 환수를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서였다.
“해외반출문화재는 우리나라가 아무리 돌려 달라고 해도 쉽게 내어 주지 않잖아요. 그러면 일반 국민들은 문화재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이 문화재가 반출됐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반출문화재를 알리기 위해서 1년에 한 번씩 반출된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어요. 아직도 4만 점이 넘는 문화재가 반출돼 있어요. 그러니 앞으로 재현해야 할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는 셈이죠.”
또 한편으로는 경기도민에게 전통 목공예의 매력을 알리며 대중화에 앞장서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천시 중포동 주민센터에서 ‘무형문화재와 함께하는 목공 이야기’로 직접 도민들을 가르치며 소통에 나선 것이다. 20명 정원으로 신청을 받았지만 무려 60명이 몰려 세 팀으로 나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일반인들 사이에서의 호응도 뜨겁다.
옛날에는 부처를 조각하는 이들을 ‘불모’라고 불렀다. 부처를 탄생시킨다는 의미에서 부처의 어머니와도 같다는 의미다. 부처를 만드는 일에 어찌 형상만이 중요할까. 조각에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하는지 이해하고, 오래전부터 내려온 예술성을 계승해야 하는 것은 물론 후세가 정확히 이 의미와 방식을 알 수 있도록 전달해야 비로소 ‘불모’라고 불릴 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