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에는 여러 개의 왕릉이 있습니다. 그중 광릉은 조선시대 7대 왕인 세조와 그의 비 정희왕후의 묘를 일컫습니다. ‘세조’ 하면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킨 잔인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강한 조선의 기반을 세운 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세조를 만나러 가는 길은 강한 조선을 만나러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뚜벅뚜벅 한번 걸어 가볼까요?
광릉으로 가기 위해서는 광릉숲을 지나야 합니다. 광릉숲은 500년간 왕실림으로 관리되고 보전돼 온 곳으로 그만큼 아름답기 짝이 없습니다. 봄에는 봄꽃이, 여름에는 무성한 녹음이, 가을에는 색색의 단풍이, 겨울에는 하얀 담요 같은 눈이 덮이는 곳이지요.
광릉으로 가는 입구에는 하마비[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가 있습니다. 큰 대, 작을 소, 사람 인, 인원 원, 모두 개, 내릴 하, 말 마. 해석하자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죠. 임금마저 말에서 내려 참배를 해야 할 정도로 존엄한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람과 햇빛을 느끼며 걷다 보면 저 멀리 홍살문이 보입니다. 그리고 붉은 정자각이 보여요.
정자각을 기준으로 왼쪽이 세조왕릉, 오른쪽이 정희왕후 윤씨의 능입니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7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 왕릉 최초로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원래 정자는 세조의 능 앞에 있었으나 정희왕후의 능을 만들면서 두 능 사이의 가운데로 자리를 옮긴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또 있습니다. 세조는 죽기 전에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때문에 이전까지는 석실로 돼 있던 능을 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진 것)으로 바꿔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봉분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병풍석을 생략하면서 그곳에 새겼던 십이지상은 난간석에 옮겨 새겼지요.
따로 또 같이 있는 왕과 왕비의 능 앞에 한참을 서 있어 보았습니다. 세조는 우리에게 수양대군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세종의 둘째 아들로서 상반된 평가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입니다.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끌어내리고 수많은 이들을 피 흘리게 하고 왕위에 앉았지요. 반면에 왕권제를 강화하고 호패법을 복원했으며 군사제도를 정비했습니다.
정희왕후 역시 역사 속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인입니다. 세조와는 금실이 꽤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남편이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직접 갑옷을 입혀 주고 말에 오르게 할 정도로 당찬 여인이었어요. 훗날 성종의 뒤에 발을 치고 앉아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까지 했으니 왕실의 여인으로 그는 모든 영광을 맛봤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7년간 수렴청정을 했던 그는 성종이 20세가 되던 해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그녀는 피부병을 앓던 남편 세조가 온천욕을 위해 머물던 온양에 자주 내려갔고 죽음도 그곳에서 맞습니다. 왕자의 아내로 들어가 왕의 아내, 왕실의 가장 웃어른으로 살았던 정희왕후의 묘가 새삼 크게 와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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