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나은•사진 김희진
농악에 포함된 의미에서의 소고춤이 아니라 단독으로 인정받는 소고춤은 우리나라에서 오직 경기도에만 있다.
과거 전국 각지마다 있던 소고춤이 모두 사라지고, 경기도에만 남아 내려오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 문화정책이 궁중문화부터 시작했잖아요. 어찌 보면 백성들이 즐기고 있던 민속문화와 전통문화는 뒷전이다 보니 50여 년 사이에 모두 소실돼 버렸죠.”
안타까움에 가슴을 치는 이는 경기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정인삼 경기고깔소고춤 보유자다. 그는 민중이 흔히 즐기던 소고춤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녀들이 꼭 춰야 하는 춤 다섯 가지 중에 소고춤이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소고춤은 늘 연회의 피날레였죠. 마지막에는 누구든 접시와 수저만 들고도 출 수 있는 춤이었으니까요.”
정인삼 선생이 소고춤에 눈을 뜬 것도 이러한 민족의 대표성 때문이었다. 1942년생인 그는 전주농림고등학교에서 전통춤을 배워 관객들 앞에서 추곤 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춤을 춰도 대부분의 관객들은 반응이 시원찮았다.
이를 고민하던 그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예부터 임금님이 보시던 춤을 췄으니 대부분의 백성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그렇다면 백성 모두가 즐기고 호흡할 수 있는 춤을 추고 싶었다.그렇게 그는 농악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다.
농악을 접한 그는 그 뒤로 전국민속예술경영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며 한국농악의 산증인이자 우도농악의 전설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동안 선생에게 소고춤을 비롯한 장검무·진쇠춤 등 경기춤을 배우고, 1974년에는 한국민속촌농악단장으로 취임해 지금까지도 한국민속촌의 농악공연을 이끌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폐회식에서 상모와 리본체조를 활용한 공연을 세계인들 앞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45년, 농악만을 바라보고 산 삶이었다.
“제가 서른세 살에 민속촌에 왔어요. 그때 여기서 늙어가다 죽고, 여기에 묻히겠다는 마음으로 왔죠. 결혼을 안 했으니 농악과 결혼하고, 민속촌과 결혼한 셈이죠.”
그리고 지금까지 농악이라는 한 길만 걸어온 그의 곁에 듬직한 아들도 생겼다. 성이 다른 양아들이자 그의 이수자인 양한 선생이다. 정인삼 선생은 양한 선생에게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던 농악, 지금까지 춘 모든 춤을 전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처음 만났는데, 어느덧 지금은 대학교 교수님이 됐어요. 제가 죽어서 아들의 손자로 태어나는 게 소망입니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소망이 있다. 전 국민들에게 소고춤의 매력을 알리는 일이다.
“저는 우리나라 오천만 국민 중에 사천만에게 소고춤을 가르치고 싶어요. 하나, 둘, 셋, 넷만 알면 소고춤은 금방 배울 수 있어요. 쉬우면서도 흥 나는 대로 출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요.”
그가 한국의 흥을 다시 북돋울 소고춤을 추자, 그동안 잊힌 소고춤은 다시 국민들에게 기억됐다. 그의 꿈에서는 오천만 국민 모두가 소고를 한 손에 들고는 ‘좋다’ ‘얼씨구’ 하는 추임새를 넣어가며 흥겨운 한마당을 벌이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