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소설 <소나기>를 처음 읽었던 그때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소년과 소녀의 사랑, 그리고 뜻하지 않은 소녀의 죽음을 전해 듣는 장면에서 느꼈던 충격. 지금도 잊지 못할 장면 장면이 떠오르는 소설이죠. <소나기>를 쓴 황순원 선생의 문학관이 양평에 있습니다. 서종면 수능리 일원이라고 합니다. 차를 몰아가는 길 내내 머릿속에서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순수의 시절, 순수한 사랑이 주었던 애틋함이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황순원문학관은 서종면에서도 중미산 기슭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최근 ‘문호리마켓’으로 유명해진 문호리를 지나 산자락을 타고 훌쩍 들어가서야 이정표를 만납니다. 아예 ‘소나기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은 산세가 수려하고 청정합니다. 문학관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는 초입, 염소 목장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염소가 반가워 울타리 너머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더니 아빠 염소인 듯한 녀석이 깜짝 놀라서 바라봅니다. 아기 염소는 저쪽 문간에서 고개를 빼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낯선 이와 눈을 맞춥니다. 귀여운 동물들과 잠시 인사를 나누고 다시 걸음을 옮겼습니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아집니다.
황순원 선생은 간결하고 세련된 문체로 유명합니다. 소설 미학의 전지적 작가 시점 기법을 잘 활용하는 이로도 잘 알려져 있죠. 소박하지만 그 이면에는 치열한 휴머니즘이 살아 있고 한국인의 전통에 깊은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그의 소설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서정미입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소나기>이고요. 이 외에도 <별> <독 짓는 늙은이> <나무들 비탈에 서다> 등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황순원문학관은 그 많은 작품 중에서도 <소나기>를 모티브로 세워졌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양평의 산자락 마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일 테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곳이 문을 연 것은 2009년 6월이었습니다. 10년을 훌쩍 넘긴 역사를 가진 곳인데도 수려한 외관은 조금도 낙후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총 47,640㎡에 3층 규모의 문학관 본관이 있고, 너른 잔디 위에 소나기 광장을 조성해 놓았습니다. 징검다리, 섶다리 개울, 수숫단 오솔길 등을 재현한 체험장도 있고요. 안쪽에는 황순원 선생의 필체를 맑은 유리에 각인해 걸어 놓은 대형 모빌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문학관은 황순원 선생이 남긴 작품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저 유명한 소설가가 남긴 소설을 읽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의 소설이 왜 그리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무엇보다 돋보였던 것은 황순원 선생의 작품을 오감으로 다시 즐길 수 있도록 해 주는 콘텐츠였습니다. 각 작품의 장면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아 소설 속 이야기가 눈앞으로 살아서 다가옵니다. 오디오북으로 그의 아름다운 문체를 마음에 다시 새길 수도 있습니다. 이 문학관을 한 문장으로 정의해야 한다면 ‘체험으로 되살아나는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느린 걸음으로 문학관을 둘러보고 되돌아 나오는 길,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맑은 산의 빛깔이 저 빗물 뒤에서 점차 희미해집니다. 소년과 소녀가 보았던 풍경이 저런 빛깔이었을까요? 소나기가 멈추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소나기 광장에서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물줄기가 하늘로 흩뿌려집니다. 인공 소나기라고 합니다. 그 사이를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물씬 밀려듭니다. 순수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한 나절이 그렇게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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