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라는 이름은 불안했던 나의 20대 시절과 유난히 겹쳐 보였습니다.
“나의 영혼은 /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 펼쳐볼 것인가”
이 문장에 사로잡혀 한참을 멍하니 되뇌었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광명에 있는 기형도문학관을 찾아 가는 길은 지난 20대의 기억과 기형도의 저 문장을 수시로 되씹는 과정이었습니다.
문학관의 외관은 다소 수수한 편에 가깝습니다. 마치 생전의 그를 닮았습니다. 기형도 시인은 그런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수수하고 순수하고 질투조차 하지 못할 만큼 다정다감한 사람. 그와 함께한 연세문학회의 문우들, 안양 ‘수리시’ 동인들, ‘시운동’의 시인들, 문단의 선후배들은 너나없이 기형도를 추억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간 기형도를 보여주는 일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문학관은 기형도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공간이지만, 많은 사람이 그를 추억하고 그의 문장을 곱씹으며 함께 완성한 곳인 듯했습니다. 유난히 검은 페이지가 많은 듯한 그의 청춘은 외로웠을지 몰라도 사후 광명시민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이곳에서 그는 외롭지 않을 듯합니다.
기형도 시인은 1985년 연세대 졸업 직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습니다. 문학회가 삶의 둥지였던 사람, 술은 못해도 음료수를 마시며 자리를 지키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노래를 부르거나 펜을 잡고 사람을 그리던 사람. 여느 청춘이 그런 것처럼 잘 웃고 한편으로 우울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등단의 길에 올랐던 그는 스물아홉 번째 생일을 엿새 남긴 1989년 3월 7일 종로의 한 극장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은 뇌졸중이었지만, 그를 아는 모두는 불가사의하게 여겼습니 다. 곧 세상의 빛을 볼 예정이었던 그의 시집은 유고 시집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 시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못한 시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지금껏 30만 부가 넘게 팔리며 세간의 사람들이 기형도라는 이름을 오래도록 부르게 해 주었습니다.
그를 추억하는 문학관은 짧은 생을 살다 간 시인의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림을 좋아한 그가 펜으로 끄적이며 그린 그림과 그가 듣던 라디오와 유럽여행에서 함께한 작은 가방까지. 한편으로 자기의 작품을 두고 얼마나 고민하며 깊이 아파했는지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여러 시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는 그의 시를 듣다가 어쩌면 그는 그가 남긴 문장의 행간에 영원히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그의 사진이 걸린 공간을 빠져나오던 그 앞에서 개관 1주년 기념작품인 기억나무를 만납니다. 노동식 작가가 만든 하얀 구름과 그 아래 쭉 뻗은 나무의 몸통. 구름 아래로 이름 모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남긴 그의 문장이 매달렸습니다. 기형도 시인이 저 나무를 본다면 얼마나 기뻐할까요. 그의 웃는 모습이 나무 뒤로 오버랩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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