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6월 20일 전국광역의원선거.
당시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가 정부의 지방자치제도 도입 연기시도를 단식투쟁으로 막아내며 얻은 값진 성과였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큰 걸음을 내딛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지방자치시대의 원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때 젊은 서형열은 경기도의원으로 출마를 하게 됩니다. 결과는 낙선. 당시 여야 간의 네거티브 과열과 금권선거로 젊고 진보적인 시민들 사이에서 정치혐오가 번진 결과 호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평화민주당이 참패를 하고 맙니다.
그리고 서형열의 도전은 계속됩니다.
1995년 6월 27일 174표 차로 낙선한 데 이어 1998년 낙선, 2000년 낙선, 2002년 낙선…. 하지만 서 의원님은 굴하지 않았고, 당이 어려울 때도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늘 앞장섰습니다.
그러다 2010년 6월 2일, 마침내 5전 6기 끝에 당선의 꿈을 이룹니다. 서 의원님은 독도로 호적을 옮기고, 일본 총리실 앞에서 ‘다케시마의 날’ 폐기를 주장하며 혈서를 쓰고, 삭발투쟁을 하셨습니다. 오사카 한국영사관으로 모여든 일본 극우들 앞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며, 애국가를 큰 소리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건설노동자와 택시운전사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했으며, 오직 시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후배 의원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도 컸습니다.
그러기에 늘 큰형님으로 기억됩니다.그러던 지난 6월 2일 오후, 회의차 도의회로 가는 길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최승원 의원님이었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떨리고 있었습니다.
“진일아, 서형열 의원님께서 돌아가실 것 같다.”
그리고 6월 8일, 서 의원님께서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빈 본회의장에 홀로 들어가 의원님의 의석 모니터에 있는 ‘출석’ 버튼을 보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제 저 출석버튼은 영원히 눌러지지 않겠구나….’
이튿날인 6월 9일, 경기도의회 제344회 정례회. 고 서형열 의원님을 떠나보낸다는 황망함에 본회의장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침울했습니다. 그리고 시작 전 송한준 의장님께서 서 의원을 추모하는 순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내 정례회가 시작됐고, 심규순 의원님의 5분 자유발언 시간이 됐습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무엇이 그리 바빠서….”
이내 심규순 의원께서는 억눌렀던 감정과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본회의장 곳곳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신정현 의원님의 5분 자유발언.
“꽃이 진 뒤 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서형열 의원님! 큰형님의 빈자리가 너무도 큽니다. SNS에는 서 의원님을 떠나보내는 분들의 애통함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 애통함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경기도의회는 서 의원님을 명예의장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리고 6월 10일, 33년 전 오늘 민주열사들의 끝없는 투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해 민주주의를 한 걸음 앞당긴 그날, 우리는 서형열 명예의장님을 떠나보냈습니다. 이제 그곳에서 편하게 영면하실 수 있도록 큰형님의 열정의 공백을 후배 의원들이 채우겠습니다. 서형열 명예의장님의 정신은 후배들에 의해 이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도민을 향한 끝없는 애정을 토대로 한 정책적 영감을 더 이상 배울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아쉽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