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거정 「필원잡기」 中 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역사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유독 많이 나오는 인물 가운데 한 분이 세종대왕이다. 가장 큰 업적인 훈민정음 창제는 물론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우리나라 과학기술과 문화가 가장 융성하게 발달한 시기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특히 세종대왕은 모든 백성이 차별 없이 원활하게 교육을 받고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데 앞장섰다. 훈민정음과 노비 장영실의 관료 등용이 그 결실이었다.
경기도의회는 이러한 세종대왕의 정신을 이어받아 도내의 모든 학생은 물론 학교 밖 청소년들까지 편견 없이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는 등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치고 있다.
여주에 자리한 세종대왕릉[영릉(英陵)]은 지난 2017년부터 2년 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왕릉유적 정비사업으로 빗장이 채워져 있었다. 올해 가을 드디어 공사가 마무리되고 모든 시설이 공개되면서 세종대왕릉의 모습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영릉을 찾아가면 가장 먼저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이 맞아준다. 다만 실내 전시공간은 10월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휴관 중이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을 지나 영릉으로 향하는 길 좌우에는 하늘을 가릴 정도로 높이 솟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리를 지어 늘어서 있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솔향을 맡으며 자연스럽게 산림욕을 즐길 수 있어 산책하듯 둘러보기에 적합하다. 다만 거리가 1㎞ 가까이 돼 편한 신발을 신고 방문하는 편이 좋다.
영릉을 향해 걷다 보면 먼저 세종대왕 동상이 맞아주는 작은 광장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세종대왕 시절에 개발된 다양한 과학기구들이 전시돼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강수량 측정기구 측우기, 물시계 자격루, 천문관측기구 혼천의를 비롯해 태양을 이용한 손 모양의 해시계인 앙부일구, 하늘의 별을 보이는 위치 그대로 둥근 구면에 표시한 천문기기 혼상,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해 천문시계의 구실을 했던 선기옥형, 해의 그림자를 재 24절기를 알 수 있게 만든 천문관측기기인 규표 등 세종대왕 시대의 교육과 지원을 통해 발달한 당시 과학기술의 정수를 살펴볼 수 있다.
광장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제관들이 머물며 제향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는 공간인 재실이 나타난다. 재실을 지나 소나무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넓은 잔디밭과 함께 홍살문과 정자각이 눈에 들어오며 본격적으로 영릉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둥근 기둥 두 개에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놓은 홍살문 바로 앞에는 긴 고랑 위로 ‘속세에서 신성한 공간으로 건너간다’는 의미를 지닌 금천교가 놓여 있다.홍살문에서 정자각은 정방형의 박석을 깔아놓은 정로(正路)로 이어져 있다. 정로를 따라 걸어가면 한자로 정(丁)자 형태와 비슷해 정자각이라고 불리는 제사를 지내는 건물에 도착한다. 정자각 좌우에는 제사 관리들의 숙소인 수복방과 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이, 측면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간략한 일대기를 기록한 영릉 표석을 보호하기 위한 영릉비각이 세워져 있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안장된 영릉은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다. 두 분은 슬하에 8남 2녀를 둔 매우 금실이 좋은 부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헌왕후가 1446년 먼저 세상을 떠나자 세종대왕이 매우 슬퍼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부처와 그 가족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을 내라고 지시했을 정도다. 원래 소헌왕후의 능은 현재의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마련됐다. 이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다. 이후 1469년 현재의 자리인 여주로 천장했다.
영릉은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숲이 호위하듯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어 보기만 해도 명당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곳이다. 커다란 반원형의 능침은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봉분에는 난간석이 둘러 있고 앞쪽으로 팔각장명등과 두 개의 혼유석이, 봉분 주위를 석양과 석호가 감싸고 있다.선선한 가을바람과 따스한 가을햇살을 누리며 푸른 잔디밭으로 둘러싸인 영릉 주위를 걷다 보면 600여 년 전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시 기득권층의 온갖 반대와 방해에 맞서 고독하고 어려운 훈민정음 창제의 길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우리글로 편하게 공부하도록 기반을 닦아 주신 세종대왕의 은혜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 가슴에 새겨진다.
한편 이곳에는 조선 17대 임금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인 영릉(寧陵)도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왕의 숲길’로 연결돼 있다. 산책 삼아 걷기 좋은 왕의 숲길을 따라 영릉까지 돌아보면 조선 초기와 중기 능의 변화된 모습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비타민D를 생성시키는 가을볕으로 몸을 건강케 하고 지식으로 마음을 살찌울 수 있으니, 이만한 가을 나들이도 없을 듯하다.
세종대왕 시대는 학문과 기술의 부흥기로 불립니다.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실력 있는 인재를 육성한 세종대왕의 강력한 지원 덕분입니다. 세종대왕이 이렇게 기반을 닦아 놓은 학문과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해 조선시대는 다양한 학문과 기술의 발전은 물론 이를 활용한 농업의 발달과 생산량의 증대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경기도의회는 세종대왕의 학문 및 기술 부흥 정책과 차별 없는 기회 제공의 원칙을 계승해 도시와 농촌, 내국인과 외국인, 한문화와 다문화 등 주어진 환경의 영향 없이 모두가 살기 좋은 경기도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에 필요한 정책 마련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