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광주는 상주·고령과 함께 질 좋은 백자를 생산하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1467년에서 1468년경 궁궐 안의 식사를 책임지던 기관인 사옹원의 분원을 광주에 설치하기도 했다. 도자기의 고장 광주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고 있는 경기무 형문화재 제41호 사기장-분청사기 보유자 박상진 선생을 만났다. 그를 만나기 위해 광주에 자리한 분청사기 전수관 ‘개천요’로 향했다.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이다. 정확하게 기원이 기재된 문헌은 없지만,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도자기로 알려져 있다. 청자나 백자와는 다르게 관이 아닌 민간에서 발전했다.
“분청사기는 말하자면 관에서 크게 관여하지 않는 도자기였습니다. 그래서 고려 시대 청자나 조선 시대 백자와는 달리 다양한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어요. 청자·백자는 일정 지역에서 나는 흙을 배합해서 만들었습니다. 반면 분청사기는 대부분 각 지역에서 나는 흙으로 만들 수 있었죠. 그래서 지역별로 특성이 잘 나타나지요.”
분청사기에는 만든 지역의 특성이 묻어 있다. 모양도 다양하고, 만드는 흙의 성분도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분청사기가 개성이 뚜렷한 이유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다른 동네 작품도 찾아보고 하지 않습니까. 옛날엔 그렇지 못했죠. 정보를 모르니까 오히려 개성이 뚜렷한 도자기가 나오는 거예요. 백자 같은 경우에는 철분 함량이 매우 적어요. 그런데 분청사기에는 철분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분청사기는 모양뿐만 아니라 흙의 성분도 지역마다 천차만별입니다.”
분청사기는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으로 발전했다. 박상진 선생은 분청사기의 매력을 ‘자유분방함의 멋’이라고 말한다. “분청사기는 강하고 부드러운 도자기입니다. 백자나 청자 같은 경우는 정리된 규칙에서 잘 벗어나지 않아요. 말하자면 정리된 아름다움이죠. 그런데 분청사기는 만들다가 조금 어긋난 부분이 있어도 그대로 놔둡니다. 자연스러움의 극치인거죠.”
박상진 선생은 분청사기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 대해서 언급했다. 자연스러움이 자칫 아무렇게나 만든다는 뉘앙스를 풍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스럽지만 그 속에 엄격하고 세세한 작업이 동반돼야만 분청사기가 완성된다고 말한다. “자연스럽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만든다는 말이 아닙니다. 작업은 아주 철저한 질서 속에서 이뤄집니다. 특히 마무리 작업에서 아름다운 사기를 만들기 위해 아주 세세한 기법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저는 ‘부드럽지만 강한 사기’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박상진 선생은 전통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되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대에 맞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저는 새로운 것을 자꾸 시도하고 도전합니다. 전통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전통이라는 뿌리를 안에서 시대에 맞는 도자기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죠. 분청사기 역시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어느 시점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 달라집니다. 전통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넘어서 다양한 방법으로 계승해야 합니다.”
전통을 답습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시도와 변형으로 시대와 유연하게 어우러지는 것이 곧 그가 말하는 계승이다. “앞으로 전수관 공간을 활용해서 새로운 시도를 해 보려고 합니다. 일반인도 와서 도자기를 배울 수 있는 쉬운 수업을 만들어 보려고 해요. 기계의 도움도 받고 해서 누구나 쉽게 도자기에 접근하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전통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일단 문턱을 낮추려고 합니다.”
전통은 ‘답습’이 아니라 ‘계승’이라 말하는 박상진 선생. 시대의 변화에 맞춰 전통을 지켜 나가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유연한 분청사기와 닮았다. 늘 변형과 도전을 이어 가는 그의 분청사기에는 시대의 모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