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등록문화재 – 파주 갈곡리성당 박해를 견뎌 신앙을 지킨 성지


박해를 견뎌 신앙을 지킨 성지
파주 갈곡리성당

조선 말기부터 대한제국까지 천주교는 우상숭배 금지 교리가 조상을 섬기는 성리학 사상을 배척하고 왕조의 근간을 뒤흔든다는 이유로 배척을 당했다. 당시 천주교는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는데, 서학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천주교 신도들은 박해를 피해 인적이 드문 첩첩산중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경기도 등록문화재 제2호에 선정된 파주 갈곡리성당은 구한말 피폐했던 당시 시대상과 신앙 마을 공동체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글. 정명곤 참고.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박해를 피해 모인 성소
파주시 갈곡리는 예로부터 칡이 많이 나 ‘칡 계곡(갈곡)’이라고 불렀다. 칡 마을의 순우리말이 칡울이니만큼 당시 갈곡리성당 역시 ‘칠울공소’라 불렸다. 공소는 본당보다 작아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천주교 공동체나 건축물을 이른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전만 해도 수풀이 우거지고 커다란 고개가 있는 험준했던 곳으로, 옹기를 만드는 점토가 많아 신도들은 옹기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1898년 칠울공소 설립할 때 신도는 총 65명이었고, 불과 2년 만인 1900년에는 신도가 145명으로늘었다. 현재는 준본당으로 승격해 40여 명의 신도가 이곳에서 신앙 마을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성당 일대의 마을 진입로, 운동장, 조경, 옹기 가마터, 칠울공소(현 사제관), 가옥 등을 통해 당시 가톨릭 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전쟁의 폐허에 피어난 성당
1936년 신도들이 마련한 공소 강당이 1951년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자 갈곡리 신도들은 옛 강당을 대신할 새 성당을 짓고자 했다. 노력 끝에 1955년 당시 한국 해병대 군종 사제였던 김창석
신부와 미국 해병대 에드워드 마 군종 신부의 도움으로 현재의 성당을 건립할 수 있었다. 신도들은 흙과 돌 등을 손수 나르며 성당을 짓는 데 힘을 보탰다. 에드워드 마 신부는 주변 밭을 사들여 신도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나눠 주기도 했다. 성당 한편에는 두 신부에게 감사를 전하며 세운 사은비가 있다.
제2호 경기도 등록문화재 선정
파주 갈곡리성당은 한국전쟁 이후 피폐한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양식을 보여줄 뿐 아니라 성당 주변으로 구한말 이후 형성된 신앙 마을 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초기 교회 사적으로 의미가 크다는 평가를 받아 경기도 등록문화재 제2호로 등록됐다.
갈곡리성당의 벽면은 석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재를 쌓는 방식이 위치에 따라 미세하게 차이가 있다. 지중보와 창대석 하부는 수평 줄눈 다듬돌쌓기로, 그 상부와 종탑은 바른층막쌓기로 시공됐다. 지붕의 구조는 목조 트러스이지만 볼트 트러스의 형상을 취하고자 하는 절충 구조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