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는 서울과 비슷한 면적에 인구 110만 명에 달하는, 수도권에 위치한 대도시다.
거대한 면적과 다양한 지형을 품고 있는 만큼 예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전설, 민담 등도 많다. 용인시의 전설을 소개한다.
부자로 살다가 죽어도 한이 남는 인생인 것을, 가난한 농부로 태어난 진천의 추천석은 슬하에 많은 자녀를 두고 아내와 함께 갖은 고생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온 저승사자가 그의 영혼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남은 가족이 밥을 굶을 것을 걱정해 저승사자에게 자신의 딱한 사정을 호소했으나 천명을 어길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염라대왕 앞으로 나아갔을 때 이름, 생년월일시가 똑같은 추천석이 용인에도 살고 있음이 밝혀졌다.
저승에 와야 할 사람은 용인에 사는 추천석이었다.
염라대왕은 진천 추천석을 이승으로 돌려보냈지만 그의 육신은 이미 땅에 묻힌 후였다.
한편 용인의 추천석은 단천 군수로 임명되어 부임할 채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고, 그날 밤 저승사자가 찾아왔다.
육신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진천 추천석의 혼백은 하는 수 없이 용인 추천석의 육신이라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용인 추천석의 집안 사람들은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 난 것으로만 알았다.
용인 추천석의 육신에 들어간 진천 추천석은 집이 낯설어 불편한 것은 물론 부잣집 영감 행세가 여간 힘들고 무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다못한 그는 그간의 경위를 털어놓고 대문 밖을 내달아 진천으로 향해 죽기 전 살던 작은 오두막집에 당도했다.
사립짝을 밀고 들어선 그는 아내를 붙잡고 자신이 남편이고 이러저러해서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말했으나 아내는 믿지 않았다.
그가 두 사람만 아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어도 반신반의할 뿐이었다.
양쪽 집에선 고을 원님에게 송사를 했다. 원님은 추천석이 저승에 다녀왔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승에는 이승의 법도가 있으며,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그 육신이 죽고 사는 것으로 판가름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용인 추천석이 분명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훗날 사람들은 육신의 주인은 마음이고, 정신이 육신의 주인이어야 하겠지만, 육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을 살 수밖에 없었던 추천석을 두고 “살아서는 진천이 좋았고, 죽어서는 용인이 좋았
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연으로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옛날에 석성산 북쪽에 할미성을 쌓을 때의 일이다.
이 할미성을 쌓기 위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을의 모든 사람이 부역했다.
아낙들은 행주치마로 돌을 싸서 매일같이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나와 “할미성을 다 쌓았으니 돌을 나르지 않아도 된다”라고 했다.
그러자 돌을 나르던 여인들이 그 자리에 돌을 내던지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때부터 그곳을 돌무더기가 담처럼 쌓인 곳이라고 하여 석담마을로 부르게 됐다.
일설에는, 석담마을의 돌무더기는 할미성을 쌓던 마고할미가 밤새 돌을 나르다가 이곳에서 잠시 쉴 때 돌을 흘린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마을 사람들은 돌무더기가 있는 곳에 할미당을 세우고 마고할미를 위해 매년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낸다.
만약 할미당에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재앙이 찾아오기 때문에 지금도 거르지 않는다고 한다.
용덕사는 용인시 이동면 묵리에 있는 절로 신라 문성왕 때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절 뒤에 커다란 굴이 있어 일명 굴암절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설은 절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용덕사 뒤로는 굴 양쪽으로 흐르는 샘물과 하늘을 향해 구멍이 뚫린 굴이 있는데, 모두들 이 굴을 용굴이라고 부른다.
옛날 옥황 상제의 노여움을 사서 인간 세계로 쫓겨난 용 하나가 이곳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백일 동안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수도를 해야 다시 승천할 수 있다고 했다.
용은 수도에 전념해 백일을 채운 후 승천하려고 했다.
당시 하늘에선 벼락이 떨어지고 사방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천둥소리가 진동해 주민들은 무서움에 감히 밖에 나오지 못했다.
용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주민 한 사람이 나무를 하고 있었는데, 이 광경을 보고 놀라 땅바닥에 엎드려 떨고 있었다.
용이 막 승천할 때 이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넋을 잃고 고개를 들어 용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은 하늘로 올라가던 중 괴음을 지르며 땅 위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용이 승천할 때 인간이 엿보아 부정이타 백일기도가 허사가 되고 만 것이었다.
용이 용굴을 벗어날 때 굴의 위가 뚫렸다고 전해지며, 이와 같은 형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용은 승천할 때 실수해 한쪽 눈을 다쳐 피를 흘렸다고 하는데, 용굴 밑으로 흐르고 있는 양쪽 샘 가운데 하나는 당시 흘린 피 때문인지 지금도 흙탕물처럼 뿌옇게 돼있다.
용굴을 타면 생명이 연장된다는 이야기가 주민들 사이에 전해진다.
옆으로 뻗은 굴은 아이들이 타는 곳이고, 곧장 위로 뻗은 굴은 어른이 타는 것이라 해 구별하고 있다.
한편, 양쪽에 흐르는 샘물은 백일 동안 용이 흘리던 눈물이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영험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소원을 빈다고 한다.
조선이 한양에 도읍지를 정하기 전의 일이다.
임금은 도읍지를 정할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전국 각지의 명산을 모두 알아 오라고 했다.
구봉산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여러 대신이 논의한 끝에 서울의 삼각산, 공주의 계룡산, 용인의 구봉산이 일차로 선정됐다.
대신들은직접 찾아가 산세를 파악했다. 구봉산은 신령스러운 산으로 대신들도 모두 감복했다.
최종적으로 삼각산과 구봉산이 선택되었으나, 감히 인력으로 선택할 만한 일이 아니라 도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한 도사가 두 산 가운데 봉우리 100개를 먼저 만드는 산을 도읍지로 정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구봉산 산신령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봉우리를 만들기 시작해 100개를 모두 만들었지만 삼각산 산신령은 봉우리 하나를 미처 만들지 못했다.
구봉산 산신령은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자 서둘렀다.
그런데 갑자기 억수 같은 비가 퍼부어 봉우리 하나가 무너지고 말았다.
구봉산 산신령이 낙담한 사이 삼각산 산신령이 마지막 봉우리를 만들어 결국 도읍지로 선택되었다.
삼각산을 배경으로 한양이 들어선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구봉산은 용인시 산 중에서 높은 산에 해당하며, 예로부터 산세가 뛰어나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구봉산이라는 명칭은 봉우리가 아홉 개라서 붙은 것으로 보인다.
이 구봉산 앞에는 무학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이 춤을 추는 지형이어서 무학(舞鶴)이라고 부른다는 설과 조선의 도읍지를 정할 때 무학대사가 묵었다고 해 무학이라고 부른다는 두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