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있는 곳에 이야기 있으니, 그만큼 풍성한 이야기를 자랑하는 곳이 경기도다.
경기도에서도 최대 교통 요지 수원에서 오고 가는 수많은 발걸음이 전해온 옛이야기 속으로 떠나본다.
500년 조선왕조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비극적인 이 사건으로 인한 한을 풀고자, 아들 정조는 즉위 후 아버지의 복권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존하는가 하면, 묘도 수원 화산(현재의 경기도 화성)의 현륭원(현재의 융릉)으로 이장했으며, 아버지 묘소와 가까운 수원에는 화성행궁을 건립해 무려 10여 차례 성묘를 할 때마다 머물곤 했다.
수원의 ‘벼락 과거’ 전설은 당시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고 느낀 정조의 마음이 담긴 이야기다.
이야기는 이렇다. 아버지 묘소를 찾기 위해 수원 화산 안녕동에 잠행을 온 정조가, 아버지 묘소에 대한 백성의 생각을 알고자 농부에게 “현륭원이 무엇인지 아느냐” 말을 걸었다.
농부는 과거의 첫 단계인 소과에 합격한 생원으로 간촌에 사는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정조의 정체를 모르면서도 사도세자에게 예를 다하며 “왕이 되실 분이었으나 뒤주에서 돌아가셨으니 뒤주 대왕이시고, 왕이 못 되신 분의 능이니 애기 능”이라 답했다.
이 말에 너무나 기뻤던 정조는 “다음 과거를 꼭 치르라”는 말을 남긴 채 환궁한다.
궁으로 돌아온 정조는 급히 과거 일정을 공표했다.
그리고 벼락 발표로 치러진 과거 날, 농부가 받아든 시제는 ‘간촌 이생원과 선비의 대화를 쓰라’였다.
자신만이 답을 아는 문제가 나온 것이다.
이생원은 당당히 답을 적어 제출하고 장원급제를 했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애틋했던 정조가, 간촌 이생원에게 ‘벼락 과거’로 보답한 것이다.
정조는 적극적으로 수원 지역을 번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정조가 아버지 묘소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17세기 후반 지역 간 활발한 경제 교류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수원의 상업은 크게 발달했다.
수원은 안성장과 서울, 그리고 삼남 상권 물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며 북문, 남문의 시장을 포함해 모두 아홉 곳의 시장이 들어서는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이토록 상업이 발달한 수원 어느 상인의 이웃에 단골손님 하나가 있었는데, 외상을 자주 지긴 해도 곧잘 갚았기에 상인은 믿고 물건을 내주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단골이 외상값 일부를 갚지 않은 채 몰래 이사를 가버리는 일이 생겼다. 상인은 백방으로 도망간 이를 수소문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이제는 나를 잊었겠지’ 안심하고 볼일을 보러 야반도주했던 마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게다가 어찌나 대담한지, 필요한 것이 생기자 외상값을 갚지 않았던 가게에도 들렀다.
물론 외상값을 갚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가게 주인은 보통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한눈에 제발로 찾아온 옛 단골을 알아보았고, 맹수 같은 기세로 튀어 나갔다.
최소한 얼굴은 가릴 작정으로 해 질 녘에 가게에 들른 노력조차 부질없이 옛 단골은 그저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났다.
그런데 그 광경이 그야말로
무더운 여름이었던 데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시간이라 속옷만 걸치고 있었는데, 이를 미처 추스르지도 못 하고 급하게 돈을 떼어먹은 사람을 잡으러 뛰쳐나간 것이다.
달밤의 속옷 추격전은 30리나 이어졌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수원 사람이 모두 그와 같은 줄 알고 ‘수치심을 잊을 정도로 돈에 관해 지독하다’는 뜻으로 ‘수원 사람은 속옷바람으로 30리를 뛴다’라고 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뼈대 있는 가문이지만 집안이 넉넉지 못한데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 병석에 누운 늙은 아버지만을 모시고 살아가는 처녀가 있었다.
시집을 가버리면 아버지를 돌볼 수 없기에, 처녀는 혼인도 포기한 채 수많은 구혼자를 뿌리치며 농사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농사일을 도맡아 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그리하여 머슴을 들이게 되었는데, 어느 날 머슴이 처녀에게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다.
절망에 빠진 처녀는 자결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이웃들은 모두 슬퍼하며 처녀를 자결한 자리에 정성껏 묻어주었다.
그때 처녀가 남긴 유서가 발견되었고, 그 사연에 분노한 이웃들은 너나없이 저마다 몽둥이를 손에 들고 머슴을 멍석말이해 내다버렸다.
얼마 후 처녀의 무덤에서 난데없이 꽃나무가 자라나 꽃을 피웠다.
꽃향기가 유달리 멀리까지 향기롭고 떨어질 때조차 훨훨 날리며 살아생전 아름다웠던 처녀를 떠올리게 하는 꽃이었다.
매년 그 꽃이 날리는 무덤 자리를 사람들은 꽃뫼(꽃산)이라 부르게 됐고, 시간이 흘러서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수원시 화서동 426번지가 그때의 꽃뫼이고, 그 주변이 꽃뫼마을이라 한다.
수원천을 사이에 둔 연무동과 조원동에도 각각 큰 바위가 있는데, 이 양쪽 바위는 특히 자손을 얻는 데 영험하다해 아이를 바라고 치성을 들이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 이 바위들을 할애비 퉁소바위와 할미 퉁소바위라 부르는 이유도, 이 바위에 아이를 바라며 기도를 올리던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와 관계 있다고 전해진다.
옛날 수원에 금실 좋기로 소문난 부부가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척 다정했지만 오랫동안 아이가 없는 것이 마음 한편의 한으로 남았다.
고민하던 부부는 바위에 치성하면 아이를 얻게 되지 않을까 싶어 백일기도를 올리기로 한다.
또 백일기도 동안에는 아무리 할 말이 있고 그리울지라도 잡념을 버리고 치성에만 집중하자 맹세하며, 다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때에는 퉁소를 불기로 했다.
남편은 연무동에 있는 바위에서, 아내는 수원천 건너 조원동에 있는 큰 바위에서 기도를 시작했다.
그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부부의 퉁소 소리가 바위에서 바위로 번갈아 울려 퍼졌다.
그런데 백일기도가 끝날 무렵, 아내가 부는 퉁소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병이 들어 남편의 퉁소 소리에 화답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상황을 모르는 남편은, 걱정이 앞섰지만 애써 불안을 가라앉히며 백일기도를 마쳤다.
백일기도가 끝나자마자 남편은 아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병이 깊었던 아내는 남편을 보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편도 그날로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따라 숨을 거두었다.
사연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그때부터 노부부가 각자 퉁소를 불던 바위를 할애비 퉁소바위, 할미 퉁소바위라 불렀다.
두 바위도 노부부를 기억하듯 바람 부는 날이면 퉁소 소리가 울린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