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는 오랜 역사만큼 마을마다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가 풍성하다.
그중 고양시의 네 가지 전설을 소개한다.
옛날 고양시의 각 마을이 처음 이름을 짓기 시작할 때 이야기이다.
다른 마을은 모두 어엿한 이름을 지어 쓰고 있는데, 한강 옆 용채이 벌판 윗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3년이 되도록 마을 이름을 짓지 못해 이웃 마을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큰 홍수로 한강 물이 갑자기 불어났는데 상류에서 이상한 물체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떠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가까워질수록 빛은 더욱 밝아졌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신기한 그 물체에 이끌려 물가로 몰려들었다.
그 물체는 용채이 벌판의 윗마을 강가로 밀려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반짝거리는 물체는 다름 아닌 흰 돌이었다.
그리고 돌 위에는 발가벗은 어린 아기가 올라앉아 조용히 웃고 있었다.
하얀 돌은 그 이상한 빛 때문에 매우 신비하게 보였다.
하얀 돌과 어린 아기는 물결을 따라 용채이 벌판을 몇 바퀴 돌더니 마을 옆 도당산 끝에 걸려 멈추었다.
그 순간 한 달 내내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넘쳐 흐르던 물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괴이한 광경에 신기해하면서 분명 하늘의 신령님이 보내주신 길조라고 여기며 흰 돌과 아기를 마을로 데려와 돌보아주었다.
그러고는 마을 이름도 백석(白石)이라 정했다.
이 일이 있은 뒤 백석마을은 날로 번성하고 좋은 일만 생겼다.
흰 돌과 아기에 얽힌 소문은 이웃 마을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소문을 들은 옆 마을의 혹부리 영감은 이를 시기해 백석마을 사람들 몰래 아기는 자루에 담아 한강에 버리고 바위도 깨부수고 말았다.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와 벼락이 치더니 혹부리 영감을 한 줌 재로 만들어버렸다.
이후로 백석마을은 점차 쇠락해 예전의 부귀영화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또 언제 올지 모를 흰 돌과 어린 아기를 기다리며 부지런히 살았다.
이 흰 돌은 255년 전 조선 영조 시절에 편찬된 <고양 군자>에도 이름을 올려놓았다.
사람들은 그 돌을 위한 도당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을 빌어왔는데, 지금도 음력 3월이면 하얀 돼지를 올리고 여인들까지 참여해 당제를 지낸다.
백석은 일산신도시 개발 중에도 무사히 보존되어 지금도 일산병원 뒤 작은 개천 옆에 가면 넓이 1.5m, 높이1.2m의 흰 돌을 볼 수 있다.
논농사로 유명한 대화동 내촌마을에는 인근 마을에도 널리 알려진 큰 웅덩이가 하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백암(白岩)웅덩이라고 불렀는데, 웅덩이 옆에 크고 흰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암웅덩이에는 오래전부터 이상한 전설이 전해 내려왔다.
그 전설은 수백 년 묵은 괴물이 웅덩이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아무도 그 괴물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괴물은 다름 아닌 이무기 두 마리였다.
30m 물속에 사는 이무기들은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 기도를 시작한 지 1,000년이 되기까지 고작 3일을 남기고부터는 바깥출입을 삼간 채 몸을 정갈히 하고 조용히 보내고 있었다.
한편 대화동의 촌로 김 노인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웬 신령이 나타나더니 백암웅덩이에 용이 되려는 이무기 두 마리가 살고 있는데 그 이무기들이 승천하는 날이 바로 내일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김 노인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꿈속에서 신령이 한 말을 전하고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도 동네 말썽꾸러기 철구는 장난을 그치지 않았다.
임신한 형수에게 새우젓을 잔뜩 먹인 것인데, 짜디짠 새우젓을 너무 많이 먹은 형수는 밤새 물을 들이켜는 바람에 잠 한숨 못 자고 오줌이 마려워 변소로 달려갔다.
그 무렵 백암웅덩이 속 이무기들은 용이 되기 위해 승천할 준비하고 있었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구름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이무기들은 서서히 웅덩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무기들이 하늘로 높이 오를수록 꼬리부터 용의 모습으로 변해 마침내 머리 아랫부분까지 용의 비늘과 발이 생겼고, 몸의 절반은 이미 구름을 뚫고 있었다.
그때 저 아래 대화동 마을을 얼핏 내려다본 이무기들은 웬 임신한 여인이 천장이 뚫린 변소에서 오줌을 누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로 통하는 문이 닫히더니 하늘이 노랗게 물드는 것이었다.
순간 하늘로 오르던 이무기들은 온몸의 힘이 모두 빠지더니 철퍼덕하고 백암웅덩이 속으로 다시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다.
1,000년 동안 기다려온 순간이 허사로 돌아가버리자 너무나 억울하고 화가 난 이무기들은 그날부터 웅덩이 밖으로 나와 마을의 논과 밭을 모두 망치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부수었다.
그런 날이 계속되자 마을 사람들은 이무기에게 용서를 비는 제사를 지내기로 하고 날짜를 정해 맛있는 음식을 올렸다.
이무기들도 정성을 갸륵히 여겨 한참을 잠잠하게 지내다가 1년에 딱 한 번 동짓달 초하루에만 웅덩이에서 나와 횡포를 부리고는 했다.
이날이면 마을 사람들은 용구재라는 고개에 올라 이무기에게 용서를 빌고 큰 제사를 지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용구재 이무기제다.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한강기슭에 124미터 높이의 덕양산이 바로 행주산성이다.
이 산꼭대기에는 권율 장군이 행주대첩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는 승전비가 우뚝 솟아있다.
1592년 4월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입했고, 전후 7년간에 걸쳐 왜란이 일어났다.
그 중 이곳 덕양산에서 벌어진 전투가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권율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같은 해 7월 8일 이치에서 왜적을 크게 격멸해 대승을 거뒀고, 12월에는 수원 곽산성에서 왜군을 무찌른 후 한양을 수복하기 위해 행주산성에 진을 치게 됐다.
권율 장군의 군대는 2천에서 3천 명에 불과했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3만 명의 왜적에 맞서 배수의 진을 쳤다. 권율 장군은 덕양산에 나무로 성을 쌓고 성의 수비에 온힘을 기울였다.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왜군은 의기충천했다.
왜군총수 우키다는 1953년 2월 13일 새벽 6시쯤 7개 부대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행주산성을 포위해 공격했다.
권율 장군은 병사들에게 친히 물을 떠 나눠주고, 주먹밥을 날라주며 격려하며 사기를 돋웠다.
왜군은 성 앞에 높이 누대를 세우고 높은 곳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우리 군사들은 손으로 들고 사용할 수 있는 화포인 지자포로 누대를 날려버렸다.
적군이 조
총, 화포 등으로 공격해 목책까지 접근하자 아군은 화포와 수차석포 등의 공격을 일시에 퍼붓고, 처참한 접근전도 벌였다.
왜군은 반나절만에 1만여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 행주대첩에서 군사 못지 않게 숨은 공을 세운 사람들이 바로 부녀자들이었다.
전투에서 육박전이 벌어졌을 때 권율 장군은 부녀자들을 동원해 투석전에 필요한 돌을 나르게 했다.
부녀자들은 겉치마를 두르고 거기에 돌을 담아 날랐다.
이로부터 유래되어 이 겉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고려 공양왕이 이성계를 피해 아내 노씨와 세자였던 아들 석과 세 딸, 그리고 아끼던 삽살개를 데리고 도망쳐 고양 견달산에 당도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사방이 캄캄해지자 왕의 가족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 산 저쪽에 불빛 하나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니 절이었다.
공양왕은 스님에게 “오갈데 없는 전 아무개란 사람입니다.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겠는지요?”라고 물었다.
스님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하의 주인이 어찌 집도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셨는지요?” 하며 공양왕의 가족을 절에 머물게 했다.
얼마 후 스님이 헐레벌떡 뛰어와 이성계 무리가 이 절을 향해 오고 있다고 말했다.
공양왕이 이 고을에 머문다는 소문을 듣고 탐문을 했다는 것이었다.
절망하는 공양왕에게 스님은 “견달산 아래에 아무도 찾지 못하는 암자가 있으니 거기로 피신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은 “삽살개는 잡아가지 않을테니 이 절에 놓아두겠습니다” 하고 가족과 함께 암자로 피신했다.
암자는 사람의 발길은 닿지 않아 안심이었지만 사흘 동안 굶주려야만 했다.
사흘 후 암자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공양왕 가족은 숨을 죽였다.
다행히 스님이 이성계 무리의 감시를 피해 겨우 밥을 가져온 것이었다.
스님은 절로 돌아간 뒤 며칠간 소식이 없었다.
다시 암자로 다가오는 발소리에 공양왕은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눈앞에는 건장한 관원들이 오라를 들고 서 있었다.
압송되는 공양왕이 절을 지날 때 삽살개가 다가와 꼬리를 비비고는 낑낑거리며 절 앞 연못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왕을 보살펴준 스님이 밥그릇을 품은 채 죽어 있었다.
삽살개는 왕이 있는 쪽을 돌아보고 연못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식사동이라는 마을 이름은 왕에게 밥을 날라다 주던 절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공양왕릉 앞에는 작은 연못과 삽살개 석상이 조성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