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깊고 물이 맑은 포천시에는 지형과 큰 인물에 얽힌 설화가 다수 전해 내려온다. 설화와 지명의 유래 등을 소개한다.
정리 정명곤 참고 향토문화자료집
구미호를 만난 고개
포천시 영북면에는 여우고개가 있다. 옛날 옛적 이동면 마당바위 쪽에 사는 노인이 철원에 사는 딸의 외손주가 장가를 가게 되어 그 고개를 넘게 됐다. 나무가 우거진 작은 길을 올라가는데, 마루터기에서 하얀 옷을 입고 갓을 쓴 남자를 만났다. 그가 장죽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노인에게 행선지를 묻고는 같은 방향이라며 동행을 제안했다. 함께 철원에 도착해 잔치 중인 딸의 집을 찾아가 반기는 가족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함께 온 사람이 생각나 찾았다. 하지만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신부 방에 가보니 신부가 둘이 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서울에 가면 창을 가지고 사냥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면 진짜 신부를 가려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를 수소문해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사냥꾼은 마당에 있던 썰개(조그만 개)를 내려 풀어놓았다. 썰개는 신부 방으로 벼락같이 뛰어들었다. 썰개가 둘 중 한 신부의 옆을 쑥 밀어 헤치니 엉덩이에 꼬리가 아홉 개나 달려 있었다. 꼬리를 들킨 신부는 재주를 넘더니 여우로 변신해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다. 그 이후 사람들은 그 고개를 여우고개로 부르게 되었다.
관련 명소 여우고개
고고한 선비들이 머문 곳
포천시 이동면에는 강원도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 예로부터 이 고개를 ‘흰 구름이 머물다 가는 고개’라고 부르기도 하고 ‘맑은 물 계곡’이라고도 불렀다. 조선 말 포천 출신의 가난한 선비였던 중암 김평목 선생이나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이곳 계곡을 매우 사랑해 함께 모여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새소리, 바람 소리를 벗 삼아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세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나라 안의 사정은 순탄하지 못했는데 양주, 포천, 양평, 가평, 연천 등 다섯 고을의 뜻있는 선비 300여 명이 1년에 한 번씩 김평목 선생이 즐겨 찾는 이 계곡을 찾아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훗날 김평목, 최익현 선생이 돌아가시자 백운계곡 일대에는 열흘간이나 비가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술꾼 30여 명이 기생을 데리고 계곡으로 놀이를 왔다. 놀이패가 김평목 선생이 지은 정자에 이르러 짐을 풀려고 하자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뒤덮이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계곡은 흙탕물이 넘쳐나 큰 물소리를 내면서 흘러내리더니 큰 바위들이 놀이패와 기생들이 있는 곳으로 들이닥쳤다. 놀이패는 황급히 몸을 피해 마을로 들어가 사랑방 노인장을 만나 의논하기로 했다. “노인장, 문안 여쭈옵니다. 막 이곳에 도착해 놀려던 놀이패입니다.” “놀이패? 놀이패라니?” “이곳 계곡의 물이 하도 맑고 물소리가 청아해 기생들까지 데려와 재미나게 놀려던 참이었습니다.” 인자한 모습의 노인장은 금방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큰소리로 꾸짖었다. “네 이놈들! 여기가 감히 어딘 줄 알고 기생까지 대동하고 와서 소란을 피우려 하느냐? 바로 여기가 조선조 말 충신 면암과 중암이 노니시던 곳이란 말이다. 어찌 너희같이 한가한 한량들의 발길로 더럽히려 드느냐?” 놀이패는 허겁지겁 젖은 옷자락을 끌며 마을에서 물러났다.
몇 날이 지나고 비는 오지 않았으나 흐리고 우중충한 날이었다. 시를 쓰는 시인들이 이 계곡의 소식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예정된 모임이라 하는 수 없이 계곡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꾸물꾸물하던 날씨가 활짝 개었다. 남녘에는 흰 구름이 떴다가 계곡을 따라 오르더니 고개를 넘어갔다. 그러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시회의 우두머리가 마을 노인을 찾았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노인은 사랑방에서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기었다. “어유, 어서 오십시오. 어젯밤 잠자리에서 선생을 반겨 모시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분부를 받으셨다니요? 노인장을 처음 뵙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노인은 차근차근 지난밤 일을 설명했다. 노인이 잠자리에 들자 노인의 선조인 중암 김평목 선생이 꿈에 나타나 내일 시를 쓰는 시인들의 시회가 열릴 테니 불편함 없이 반겨 모시라는 내용이었다. 감탄한 시인들은 중암 후손들의 환대를 받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이때부터 이 계곡을 백운계곡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백운계곡 입구에는 중암 선생의 비석이 계곡을 안내하고 있다.
관련 명소 백운계곡
포천 일대에서 잘 쓰는 말
포천 일대에서는 ‘소 까닭’이라는 해학적인 말을 사용하는데, 이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포천시 소흘면 송우리에는 우시장이 크게 섰다. 어느 날 사돈지간인 두 사람이 소를 팔러 와 우시장에서 만났다. 그들은 반가운 나머지 소를 팔 생각은 하지 않고 주막에서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곤드레만드레했다. 헤어질 때가 되자 날은 어둡고 술에 취해 각각 서로의 소를 바꿔 탄 줄도 모른 채 소가 가는 대로 가게 됐다.
이튿날 아침 깨어보니 도착한 곳은 각각 사돈의 집이었다. 망신한 두 사람은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다 길에서 또다시 만나게 됐다. “사돈, 이런 실수가 또 어디 있겠소. 이건 오로지 소를 바꿔 탄 까닭이오. 과히 허물하지 마시오.” “암! 우리가 소를 바꿔 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겠소. 에이, 소 까닭이오. 소 까닭.” 그런 일이 있은 뒤로 포천 일대에선 ‘소 까닭’이란 말이 떠돌게 됐다.
관련 명소 소흘면
억새꽃 축제로 유명한 명성산은 포천 여느 지역에 비해 궁예와 관련한 이야기가 매우 풍부하다. 궁예가 왕건의 군대에 패하고는 도망했다고 해 패주동(敗走洞)이라 불리다 그 음이 변해 지금은 파주골 (坡州洞)이 되었다. 다시 궁예는 명성산에 은거해 성을 쌓고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왕건의 군대가 명성산 뒤쪽을 포위하자 군사 대부분이 명성산 앞 절벽에 떨어져 죽고 궁예는 북쪽으로 간신히 도망해 부양(斧壤, 지금의 평강)에 이르렀다. 이때 도망하지 못한 궁예의 군사와 그 일족이 온 산이 떠나가도록 울었다고 해 ‘울음산’, 곧 명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영북면과 철원군 갈말읍에 걸쳐 있는 명성산에는 망봉(望峰)[혹은 망무봉(望武峰)], 궁예왕굴, 항서받골(降書谷) 등의 지명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한다. 망봉은 궁예가 지금의 산정호수 좌우로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망원대(望遠臺)를 올리고 봉화를 피웠다는 곳이다. 명성산 상봉에 위치한 궁예왕굴은 궁예가 왕건의 군사에게 쫓겨 은신하던 곳이다. 항서받골은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다가 항복을 했다는 곳인데, 원래는 궁예가 왕건 부자로부터 투항하라는 서한을 받은 곳으로, 이후 와전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화현면 현등산의 홍폭(虹瀑)에도 왕건에게 쫓겨 온 궁예가 피투성이가 된 몸을 씻고 성을 쌓아 저항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명성산을 빠져나온 궁예는 이후 철원 경계로 들어가 부양 쪽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궁예가 철원 북방으로 패주할 때 한밤중에 왕건 군사의 급습을 받아 싸웠다는 곳이 야전(野戰)골이다. 이동면 도평3리의 도마치(道馬峙)는 궁예가 왕건과의 명성산 전투에서 패해 도망할 때 이곳을 거쳤는데, 산길이 너무 험난해 말을 내려 끌면서 갔다고 해 붙은 이름이라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관련 명소 명성산
산과 풀이 많아 ‘소흘읍’
소흘읍의 소(蘇)는 풀 이름인 ‘차조기’로 풀이되며 흘(屹)은 ‘우뚝 솟을’로 산이 높다는 뜻이다. 주위에 산이 많고 나무와 풀이 무성했던 이유로 이처럼 불렀다.
마을을 더해 ‘가산면’
가산면은 조선 시대 화산면으로 불렸다. 1914년 부·군·면을 폐합할 때 청량면의 일부인 감암리, 우금리, 마전리를 편입하며 ‘더할 가(加)’ 자를 붙여 가산면이라 이름 붙였다.
맑고 푸른 물이 흘러 ‘창수면’
남면에 서면과 하리면을 병합하면서 영평천의 푸르고 맑은 물이 면의 중앙인 창옥병(蒼玉屛) 연안으로 흐른다고 해 창수면으로 불렸다.
관직을 버린 어진 관리가 살던 ‘관인면’
신라 말 궁예가 태봉을 건국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했을 때 궁예의 학정에 못 이겨 어진 관리들이 관직을 버리고 성 밖인 이 지역에 모여 살았다. 이런 이유로 관인면으로 불렸다.
어르신을 위한 큰 글씨
고고한 선비의 얼이 새겨진 백운계곡
포천 백운계곡은 조선 말 나라를 사랑한 선비들이 모여 시국을 의논하고 시를 짓던 곳으로 바른 마음을 쓴 이들에게만 맑은 날씨를 허락했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포천에서 잘 쓰는 말 ‘소 까닭’
소를 팔러 온 사돈지간인 두 사람이 밤새 술을 마시다 소를 바꿔 타고 각각 사돈댁으로 가 망신한다. 귀갓길에 만난 두 사람은 단지 소를 바꿔 탄 이유로 이런 일이 생겼다고 이야기를 나눈 데서 ‘소 까닭’이란 말이 생겼다.
궁예 일족과 군사들이 울었던 명성산
명성산의 이름은 왕건에 패퇴하던 궁예 일족과 군사들이 온 산이 떠날 정도로 울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화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