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정명곤 참고 경기도메모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명당 찾아 근심 잊고 묵은 곳
망우리와 왕숙천
태조 이성계는 조선 개국의 위업을 달성했으나 자신이 죽어 묻힐 길지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중 친구 무학대사와 함께 지금의 구리시 동구동 검암산 자락에 만년 유택의 명당자리를 답사했다.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넘어 환궁하던 중 “이제야 근심을 잊었다”라고 말해 그 고개의 이름이 ‘잊을 망(忘)’, ‘근심 우(憂)’ 자를 써 망우리고개가 됐다. 태조는 동구릉 유택지를 둘러보기 위해 검암산 동쪽 개울가에서 문무백관과 함께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 연유로 개울 이름이 왕숙천(王宿川)이 되었다는 지명 유래가 전해진다.
망우리는 ‘근심을 잊는 곳’이라 알려지며 일대에 공동묘지가 자리했다. 만해 한용운, 역사학자 문일평,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 독립운동가 오세창,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 항일운동가이자 정치인 조봉암 등 유명인사도 이곳에 안장되었다.
쌀이 나왔던 바위
대성암 쌀바위
구리시 아천동 대성암(현 범굴사) 쌀바위와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옛날 대성암에는 사람 수대로 쌀이 나오는 바위가 있었다. 공양주 보살이 쌀 받을그릇을 갖다 놓으면 쌀바위에서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사람 수만큼 쌀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한꺼번에 많은 쌀을 얻을 욕심으로 바위를 두드려 깼는데, 쌀은 나오지 않고 허연 쌀뜨물만 쏟아져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때 쌀바위를 깬 사람은 쌀뜨물에 맞아 눈이 멀었고, 이후 다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암자 뒤 검은 바위의 하얀 부분이 그때 쏟아져 나온 쌀뜨물이 말라붙은 자리라고 전해진다.
대성암 쌀바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칡과 매화가 많아 ‘갈매동’ 조선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구리 지역에 능을 조성하면서 붙은 지명이라고도 하고, 구리시 동구동 너머에 칡과 매화가 많아 갈매동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개메기 ‘개메기’는 옛날 수택동에 제방이 없을 때,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넘쳐 밭으로 흘러 들어온 곳이라 해 붙은 이름이다. 농사지을 때, 물이 넘쳐 농지를 덮으면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개모기’라고 했다.
가마솥골 구리시 수택동에는 소씨가 많이 살았다는 가마솥골이 있는데, 마을 지형이 마치 소가 물을 먹는 형상이라 한다. 또 마을에는 소가 물을 먹는 모양처럼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바위가 있는데, 이를 가마솥 또는 ‘굉(구유)’이라고 했다.
약속 어긴 욕심 많은 주인
사노리 용의 혈 명당
‘사노리 용의 혈 명당’은 사노리 이보국 대감 집 뒤에 있는 묏자리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다. 대감의 부탁을 받은 지관은 묏자리를 잡아주면 자기 눈이 멀게 된다며 꺼렸다. 이에 대감은 만약 지관이 맹인이 된다면 반드시 도와주기로 약속했고, 지관은 이를 믿고 묏자리를 봐주었다. 지관 덕분에 대감 집안은 경사가 이어졌으나, 지관은 맹인이 되고 말았다. 주인은 약속대로 맹인이 된 지관을 한두 해 동안은 도와주었지만, 그 뒤로는 모른 척했다. 먹고살기가 어려워진 지관은 대감의 집안을 망하게 하는 방법을 알아낸 다음 대감을 찾아갔다. 지관은 대감에게 “땅에 용의 머리와 목에 해당하는 부분에 바늘 열 쌈을 묻고 신도비를 세우면 왕기가 뻗쳐 천하를 얻을 수 있다”라고 거짓을 말했다. 욕심 많은 대감은 지관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지관의 생각대로 대감 집안은 망하고 말았다.
우미내마을 ‘우미내’란 움이 튼다는 우리말이다. 이 마을은 따뜻해서 움이 잘 트고, 나무가 잘 자란다는 뜻으로 ‘우미내’라고 불렀다. 우미내를 소꼬리인 ‘우미(牛尾)’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궁말 구리시 인창동 ‘궁말’에는 어린 공주의 무덤이 있어 ‘궁이 있는 마을’이라는 유래와 왕이 어떤 여인과 하룻밤을 보냈는데 그 여인이 죽자 여인의 집 근처에 묻어주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돌섬마을 구리시 토평동에 있는 돌섬마을은 예로부터 돌이 많았다. 고종 황제가 이 마을을 지나다 보니 마을에 나무와 돌이 많고 아름다워 마을 이름을 ‘석도’라고 지어주었다.
백교마을 구리시 교문동에 있는 백교마을은 마을 앞에 하얀 돌로 징검다리를 놓아 큰 다리라는 뜻의 ‘한다리’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백교(白橋)’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처음의 큰 다리라는 의미와 달리 ‘하얀 다리’라는 뜻이 됐다.
없는 사람과 나누던 활빈당
동구릉 수릉 긴골의 도적떼
동구릉 수릉에 전해 내려오는 도적 떼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 후기까지 구리시 수릉 긴골에는 도적이 들끓었다. 하지만 도적 떼는 인근 마을 사람들은 해치지 않고 다른 곳에서만 재물을 훔쳐 오면서 동구릉에서는 숨어 살기만 했다.
도적 떼는 수백 명이 넘는 규모로, 활빈당이라고 했다. 이들은 가난한 백성의 것은 도적질하지 않고 부유한 사람에게서 가져온 물건을 오히려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나라에서도 동구릉은 부모와 선왕들이 계신 곳인데 어떻게 도적 떼를 잡아가느냐며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수릉 긴골에 살던 도적 떼의 두목 김영근을 광나루에 빠뜨려 죽였다.
그 뒤 수릉 긴골에서 도적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동구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