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시는 한반도 중앙부에 자리한 지역으로, 젖줄인 신천 유역을 중심으로 오래전 구석기시대부터 한민족이 살던 곳이다. 긴 역사만큼 동두천시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와 지명의 유래가 풍부하다. 동두천의 설화를 소개한다.
글 구지회 사진 및 출처 지역N문화
소를 끌고 간 이무기 ⓒ지역N문화
이무기가 살던 곳
경기도 동두천시 광암동에서 동북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쇠목계곡’과 ‘쇠목마을’이 있다. 옛날 옛적 어느 날 지금의 쇠목마을 입구 폭포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그날 이후 들에 매어 놓은 소가 없어지곤 했다. 이에 하루는 동네 사람들이 숨어 살펴보니, 폭포수에서 큰 이무기가 나와 소를 끌고 그 밑 연못[沼]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소는 잃었지만 비를 내려주는 이무기를 찾은 마을 사람들은 이후 가뭄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가뭄이 들 때마다 이무기가 있는 연못물을 퍼내고 징을 두들기면 화가 난 이무기가 비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이무기가 살던 연못 자리는 송아지 소, 마을은 쇠목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쇠목계곡 ⓒ지역N문화
불심에 움직인 신묘한
어느 무더운 여름날, 한 남자가 고개를 넘다가 황금 부처상을 발견했다. 가져다 팔 생각에 남자는 부처상을 집어 올리려 했지만 웬걸, 부처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대기로 이리저리 부처상을 움직이다가 눈을 다쳐 실명까지 하게 되었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어느 스님이 부처상을 찾았는데, 정성스럽게 염불을 외고 절을 하자 꿈쩍 않던 부처상이 가벼이 들렸다. 이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그 후 이 고개를 부처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임금님이 물 마신 곳
이방원은 제1·2차 왕자의 난으로 형제를 포함해 수많은 이를 죽이고 태종으로 즉위했다. 이를 지켜본 아버지 이성계는 참담한 심정으로 한양을 떠나 함흥으로 향했는데, 길을 가던 중 마음을 달래줄 만큼 시원하고 맑은 물 한 그릇을 마셨다고 한다. 이때 왕께서 다녀간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 백성들이 왕이 드신 물[御水]이 난 자리를 ‘어수동’이라 하고 이곳에 팔각으로 정자를 짓고 어수정이라 부르며 기념했다.
조선 태조 어진 ⓒ문화재청
아들 점지하는 ‘아들바위’ 동두천시 탑동 낙모루마을과 동점마을 중간 지점인 개천 가운데 우뚝 선 두 바위다. 자손 없는 이가 낙모루마을 서향 30m 지점 낭바위에 앉아 아들바위에 돌을 던져 맞히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남편을 기리던 ‘불당고개’ 병자호란 때 울산 박씨가 지금의 동두천 광암 6통에 피신해 있다가 강화도에서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 박씨는 불당을 짓고 남편의 영혼을 위로했는데, 그 자리를 불당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안흥사가 있던 ‘안흥동’ 조선시대 말 안흥사라는 절이 있던 동네라 붙은 이름이다. 이제 절은 온데간데없고 돌담의 흔적만 남아 있다.
종이마을과 사당마을이 있던 ‘지행동’ 지행동은 닥나무로 종이[(紙]를 만들던 지동(종이골)과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 있는 행단마을의 첫 글자를 따서 생긴 이름이다.
검은 바위가 많은 ‘검므넴이고개’ 동두천시 지행동 안골에서 광암동 턱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부터 이곳에 검은 바위들이 무수히 널려 있어 ‘검므넴’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소요산에는 곳곳에 해골물의 깨달음으로 유명한 신라시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가 스며 있다. 특히 소요산에 위치한 작은 암자 자재암은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 중 하나다. 옛날 옛적 어느 날 원효대사가 경주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며 다녔다. 이 노래를 들은 태종무열왕은 ‘누군가 원효대사와 귀부인을 맺어주면 신라의 큰 보탬이 되는 인물이 태어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무열왕의 딸 가운데 요석공주가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었기에 원효대사와 맺어줄 결심을 하고 그 방법을 찾았다. 요석공주도 평소 원효대사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지라 매우 기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궁궐 사람들은 원효대사가 문천교를 지난다는 사실을 알고 요석공주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요석공주는 반드시 원효대사를 궁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하였고, 나졸들은 문천교에 밑에서 원효대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원효대사가 문천교 들어서자 나졸 대장이 정중하게 “원효대사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요석궁으로 가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런데 원효대사는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가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급해진 대장은 원효대사의 앞을 막아서서, “대사님, 저와 무예를 겨루어 이기시면 가던 길을 가시고, 지면 저희와 함께 가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원효대사는 이를 승낙하고 무술을 겨루었다. 무술이 뛰어났던 대장도 출가 전 낭도로서 무예가 깊었던 원효대사에게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소요산 단풍 ⓒ경기도
기대와 달리 대장이 패하자, 이번에는 모든 나졸이 한꺼번에 덤볐으나 이길 수 없었다. 마지막 나졸 하나가 원효대사를 잡으려 하자 일부러 발을 헛디딘 척하며 문천교 밑으로 빠졌다. 결국 원효대사는 나졸들과 함께 요석궁으로 갔고, 요석공주는 젖은 옷을 말려야 한다며 며칠 동안 궁에 머물게 했다. 원효대사가 요석궁에 머물렀던 것은 단 사흘뿐이지만, 요석공주와 인연이 되어 부부의 연을 맺고, 훗날 설총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요석공주를 사랑하게 된 일로 파계의 길을 걷게 됐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낮추며 중생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았다. 그리고 광대들이 사용하는 큰 박을 본떠 ‘무애’라는 도구를 만들어 북처럼 치고 다녔는데, 이렇게 신라 전역을 다니며 사람들을 교화해 삼국통일의 원천이 되도록 했다. 이후 원효대사는 40세가 되었을 때 소요산의 원효대에서 수행에 전념했다. 수행 일념으로 인적이 드문 소요산에 찾아들어 초막을 짓고 정진한 곳이 바로 현재의 자재암이다. 요석공주도 설총을 데리고 원효대 인근에 작은 별궁을 짓고, 아침마다 원효대를 향해 삼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 소요산의 정상인 의상대 옆에는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두고 이름지었다는 공주봉도 있다.
원효대사 ⓒ지역N문화
자재암 ⓒ경기도
날개 달린 아이와 망아지
동두천시 걸산동에 망아뜰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 지명은 조선조 말에 있었던 한 이야기에서 유래된다. 먼 옛날 가난한 화전민에게 날개 달린 아들이 태어났다. 이를 본 화전민은 ‘아들이 너무 비범해 역적이 되겠구나’ 싶어 두려운 마음에 황급히 인두로 아들의 날개를 지졌다. 크게 다친 아이는 죽고 말았고, 이와 동시에 갑자기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더니 집 앞뜰에 망아지 한 마리가 나타나 요란하게 울다가 죽었다. 이 비범한 아기를 태우려고 왔다가 아기와 운명을 같이한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그 화전민의 집 앞뜰 자리를 ‘망아뜰’이라 부르게 되었다.
송천부락과 라리부락이 있던 ‘송내동’ 송내동은 송라부락이라고도 불리는데, 양주군 용암리 ‘송천부락’과 ‘라리부락’의 한 글자씩을 따서 ‘송라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송씨가 살던 곳 ‘송터고개’ 생연1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목골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언덕이다.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송질의 후손 송반이 낙향해 살던 집터가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해 ‘송터고개’라 부른다.
걸출한 인물이 탄생하는 ‘걸산동’ 소요산의 성스러운 기운을 받아 훌륭한 인물이 태어날 수 있는 땅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보안리와 축산부락이 있던 ‘보산동’ 보안리와 축산부락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보산동’이라 불렀다.
탑과 석불이 있던 ‘탑동동’ 회암사의 아홉 암자 중 하나가 있던 자리다. 탑과 석불이 있어 ‘탑동동’이라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