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현탁 (소설가)
고층빌딩 맨 꼭대기 층.
민호는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몰아쳐 들어와 민호의 얼굴을 때렸다. 하늘을 봤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이 온통 먹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민호는 창밖을 향해 연신 담배 연기를 푹푹 내 뿜었다.
엊저녁, 퇴근길에서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여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젊은 날 결혼을 꿈꾸던 지선이 같았다. 달려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내가 곁에 있어 모른 척 지나 갈 수밖에 없었다.
대학시절, 지선과 헤어지던 그날도 겨울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4학년 때 동아리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며 결혼을 꿈꾸던 민호였다. 하지만 만나면서 집안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그러다 민호가 졸업을 하고 결혼을 하자고 졸라대자, 그제야 서로의 집안 이야기를 꺼냈다.
민호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지선의 집안은 예상외로 엄청난 부자였다. 그것도 계열사를 몇 개나 가진 준재벌 집안이었다. 서로의 집안 이야기를 나눈 후 얼마 되지 않아 지선이 점점 싸늘하게 변해갔다.
“민호씨는 성격도 좋고 사람도 똑똑하지만 결혼은 이상만으로 살 수 없어. 가난이라는 것은 행복을 송두리째 갈등으로 변해버리게 할 수도 있어. 부모님도 반대지만 나도 반대야. 그리고 아버지는 고전적 성격이어서 내게는 유산을 하나도 주지 않아. 모두 장남에게 물려준대. 그러니까 우리 집 재산은 기대할 수도 없어.”
지선은 차갑게 말을 던지고 다시는 찾지 말라며 돌아섰다. 하지만 민호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깔끔하고 매서운 성격이지만 거꾸로 보면 자신을 꿋꿋이 지킬 수 있는 여자라서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다 외모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미인이었다. 민호는 그런 매서운 여자에게 매력이 더 있었다.
민호는 지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거의 매일 꽃을 가지고 지선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지선은 눈길도 주지 않고 큰 대문을 꽝 소리가 나도록 닫고 들어가 버렸다. 집 앞에서 지선을 기다리며 설득해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민호는 방법을 바꿨다. 이번에는 편지를 이틀에 한 번 꼴로 보냈다. 그것도 글을 쓰는 친구에게 도움을 받아 눈물이 찡할 정도로 절절하게 써서 보냈다. 역시 대답은 싸늘했다.
“사랑은 마음도 중요하지만 조건이 더 중요해. 아무리 지식이 있고 선량해도 돈과 바꿀 수 없어. 사람들은 돈이 뭐 중요하냐고 하지만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가난한 사람이 부둥켜안고 있다고 해서 문풍지 사이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을 순 없잖아.
꿈 깨, 결혼은 현실이야.”
“그래, 지선이 말도 옳아. 나도 지금은 가난하지만 큰 돈 벌 수 있어. 그래서 경영학과를 택한 거야. 날 때부터 금 수저를 받은 사람이 몇이나 돼. 내 말을 믿어 봐. 나도 재벌이 될 수 있어.”
“피, 재벌이 그냥 돼? 경영의 기초도 몰라. 자본이 있어야지 자본.”
지선은 민호의 야심찬 계획을 비웃으며 끝내 민호의 곁을 떠났다. 지선이 떠나고 민호는 입술을 깨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꼭 성공할거야. 재벌이 돼서 지선에게 보란 듯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 거야.”
지선과 헤어진 후 민호는 막노동 공사판을 찾았다. 일당도 많았지만 빨리 클 수 있는 건 건설업뿐이었다. 민호는 공사판에서 십장을 거쳐 현장감독도 하면서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다.
그리고 얼마 후, 마침내 조그마한 건설 회사를 차렸다. 민호의 건설업은 아파트 붐을 타고 순풍에 돛단배처럼 날로 성장했다. 드디어 건설업 도급 순위 전국 10위권에 들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렇게 부를 축적한 민호는 강남에 빌딩도 몇 채 소유하게 됐고, 30층 빌딩 꼭대기에 집무실도 마련했다. 민호는 창밖을 내다보며 가끔씩 지선을 떠올렸다.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아마 정략결혼을 하고 귀부인 티를 내며 떵떵거리고 살고 있겠지. 수소문을 해 한 번 만나보고 싶기도 했지만 괜한 잡음을 일으켜 아내를 속상하게 할까봐 접어뒀다. 격세지감이라고 할까,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어쨌든 민호는 지선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지금의 민호가 건재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민호는 더 넓고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더 유명해지면 지선도 저절로 알게 되겠지. 나와 결혼하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 줘야지. 세계적 기업을 일군 경영자의 경영방식은 뭘까’ 민호는 그들이 쓴 책을 보면 새로운 영감이 떠오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어 주저 할 것 없이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에서 세계의 부호들이 저술한 책을 몇 권 샀다. 민호는 책을 사들고 집무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책을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 창문 옆 빈 공간에 뒀다.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나오는데 머리에 머플러를 덮어 쓴 여인이 옆구리에 종이 박스를 끼고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순간, 민호는 창문 쪽을 보았다.
책이 없었다.
“이런, 내 책! 아주머니! 내 책 왜 가져가는 거예요!”
민호가 소리쳤다. 민호의 호령에 그녀가 주춤거리며 고다수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버리는 건줄 알았어요.”
“보면 몰라요. 금방 산 새 책인데, 이리 주세요. 훔쳐 간 거잖아요.”
“그, 그건 아니에요. 사람도 없고 어쨌든 죄, 죄송해요.”
민호는 고개를 살짝 처든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가난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 오죽했으면 이 책도 종이로 팔고 싶었을까.
“알았어요. 박스를 줍고 다니니까 제가 봐 준겁니다. 앞으로 절대 그러지 마세요.”
그녀가 고개를 들고 눈물을 글썽이며 꿇어앉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두 손을 비비며 민호에게 애원했다.
순간, 민호의 눈이 달덩이만큼 커졌다. 그녀도 흠칫 놀라며 몸을 가볍게 떨었다.
“아, 지선씨! 지선씨, 아닙니까?”
민호가 더듬거렸다.
“아, 아니에요.”
“저 저 박민홉니다. 저 모르겠어요?”
민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가 엘리베이터 스위치를 눌렀다.
“아니, 지선씨 이게 무슨 모양입니까?”
“아, 아니, 저, 지선씨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
민호가 그녀의 얼굴을 보려 다가가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민호는 한동안 정신을 잃은 채 멍하니 서있었다.
창 밖에는 하염없이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민호는 얼른 창문을 열고 아래쪽 주차장을 바라봤다.
빌딩 아래 쓰레기 하치장 쪽으로 그녀가 온 몸에 비를 맞으며 처절처절 걸어가고 있었다.
민호는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몰아쳐 들어와 민호의 얼굴을 때렸다. 하늘을 봤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이 온통 먹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민호는 창밖을 향해 연신 담배 연기를 푹푹 내 뿜었다.
엊저녁, 퇴근길에서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여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젊은 날 결혼을 꿈꾸던 지선이 같았다. 달려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내가 곁에 있어 모른 척 지나 갈 수밖에 없었다.
대학시절, 지선과 헤어지던 그날도 겨울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4학년 때 동아리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며 결혼을 꿈꾸던 민호였다. 하지만 만나면서 집안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그러다 민호가 졸업을 하고 결혼을 하자고 졸라대자, 그제야 서로의 집안 이야기를 꺼냈다.
민호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지선의 집안은 예상외로 엄청난 부자였다. 그것도 계열사를 몇 개나 가진 준재벌 집안이었다. 서로의 집안 이야기를 나눈 후 얼마 되지 않아 지선이 점점 싸늘하게 변해갔다.
“민호씨는 성격도 좋고 사람도 똑똑하지만 결혼은 이상만으로 살 수 없어. 가난이라는 것은 행복을 송두리째 갈등으로 변해버리게 할 수도 있어. 부모님도 반대지만 나도 반대야. 그리고 아버지는 고전적 성격이어서 내게는 유산을 하나도 주지 않아. 모두 장남에게 물려준대. 그러니까 우리 집 재산은 기대할 수도 없어.”
지선은 차갑게 말을 던지고 다시는 찾지 말라며 돌아섰다. 하지만 민호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깔끔하고 매서운 성격이지만 거꾸로 보면 자신을 꿋꿋이 지킬 수 있는 여자라서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다 외모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미인이었다. 민호는 그런 매서운 여자에게 매력이 더 있었다.
민호는 지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거의 매일 꽃을 가지고 지선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지선은 눈길도 주지 않고 큰 대문을 꽝 소리가 나도록 닫고 들어가 버렸다. 집 앞에서 지선을 기다리며 설득해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민호는 방법을 바꿨다. 이번에는 편지를 이틀에 한 번 꼴로 보냈다. 그것도 글을 쓰는 친구에게 도움을 받아 눈물이 찡할 정도로 절절하게 써서 보냈다. 역시 대답은 싸늘했다.
“사랑은 마음도 중요하지만 조건이 더 중요해. 아무리 지식이 있고 선량해도 돈과 바꿀 수 없어. 사람들은 돈이 뭐 중요하냐고 하지만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가난한 사람이 부둥켜안고 있다고 해서 문풍지 사이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을 순 없잖아.
꿈 깨, 결혼은 현실이야.”
“그래, 지선이 말도 옳아. 나도 지금은 가난하지만 큰 돈 벌 수 있어. 그래서 경영학과를 택한 거야. 날 때부터 금 수저를 받은 사람이 몇이나 돼. 내 말을 믿어 봐. 나도 재벌이 될 수 있어.”
“피, 재벌이 그냥 돼? 경영의 기초도 몰라. 자본이 있어야지 자본.”
지선은 민호의 야심찬 계획을 비웃으며 끝내 민호의 곁을 떠났다. 지선이 떠나고 민호는 입술을 깨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꼭 성공할거야. 재벌이 돼서 지선에게 보란 듯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 거야.”
지선과 헤어진 후 민호는 막노동 공사판을 찾았다. 일당도 많았지만 빨리 클 수 있는 건 건설업뿐이었다. 민호는 공사판에서 십장을 거쳐 현장감독도 하면서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다.
그리고 얼마 후, 마침내 조그마한 건설 회사를 차렸다. 민호의 건설업은 아파트 붐을 타고 순풍에 돛단배처럼 날로 성장했다. 드디어 건설업 도급 순위 전국 10위권에 들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렇게 부를 축적한 민호는 강남에 빌딩도 몇 채 소유하게 됐고, 30층 빌딩 꼭대기에 집무실도 마련했다. 민호는 창밖을 내다보며 가끔씩 지선을 떠올렸다.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아마 정략결혼을 하고 귀부인 티를 내며 떵떵거리고 살고 있겠지. 수소문을 해 한 번 만나보고 싶기도 했지만 괜한 잡음을 일으켜 아내를 속상하게 할까봐 접어뒀다. 격세지감이라고 할까,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어쨌든 민호는 지선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지금의 민호가 건재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민호는 더 넓고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더 유명해지면 지선도 저절로 알게 되겠지. 나와 결혼하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 줘야지. 세계적 기업을 일군 경영자의 경영방식은 뭘까’ 민호는 그들이 쓴 책을 보면 새로운 영감이 떠오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어 주저 할 것 없이 서점으로 향했다. 서점에서 세계의 부호들이 저술한 책을 몇 권 샀다. 민호는 책을 사들고 집무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책을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 창문 옆 빈 공간에 뒀다.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나오는데 머리에 머플러를 덮어 쓴 여인이 옆구리에 종이 박스를 끼고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순간, 민호는 창문 쪽을 보았다.
책이 없었다.
“이런, 내 책! 아주머니! 내 책 왜 가져가는 거예요!”
민호가 소리쳤다. 민호의 호령에 그녀가 주춤거리며 고다수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버리는 건줄 알았어요.”
“보면 몰라요. 금방 산 새 책인데, 이리 주세요. 훔쳐 간 거잖아요.”
“그, 그건 아니에요. 사람도 없고 어쨌든 죄, 죄송해요.”
민호는 고개를 살짝 처든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가난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 오죽했으면 이 책도 종이로 팔고 싶었을까.
“알았어요. 박스를 줍고 다니니까 제가 봐 준겁니다. 앞으로 절대 그러지 마세요.”
그녀가 고개를 들고 눈물을 글썽이며 꿇어앉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두 손을 비비며 민호에게 애원했다.
순간, 민호의 눈이 달덩이만큼 커졌다. 그녀도 흠칫 놀라며 몸을 가볍게 떨었다.
“아, 지선씨! 지선씨, 아닙니까?”
민호가 더듬거렸다.
“아, 아니에요.”
“저 저 박민홉니다. 저 모르겠어요?”
민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그녀가 엘리베이터 스위치를 눌렀다.
“아니, 지선씨 이게 무슨 모양입니까?”
“아, 아니, 저, 지선씨 아니에요. 잘못 보셨어요.”
민호가 그녀의 얼굴을 보려 다가가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민호는 한동안 정신을 잃은 채 멍하니 서있었다.
창 밖에는 하염없이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민호는 얼른 창문을 열고 아래쪽 주차장을 바라봤다.
빌딩 아래 쓰레기 하치장 쪽으로 그녀가 온 몸에 비를 맞으며 처절처절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