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 삼도의 요충이 되는 지점에 있었으니

“삼도의 요충지로 사신과 빈객이 왕래하는 말굽 소리와 수레 소리가 엇갈린다.” 조선초기의 학자인 서거정이 평택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하륜 또한 “길이 남과 북으로 통한다”고 말했습니다. <평택군지>에 따르면 ‘청북면 고잔리의 고잔포는 한강 하류를 거쳐 마포나 인천으로 가는 뱃길 중에서도 중요한 포구’였습니다. 지리적인 이유로 육로교통과 뱃길이 고루 발달한 셈입니다.

 

성과 역과 원이 많았던 곳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맹주였던 목지국에 속했고, 삼국시대에 일시적으로 고구려의 땅이었다가 백제의 하팔현에 속했습니다. 신라 때부터 팽성으로 불렸고, 고려 명종 때 땅의 생김새가 펑퍼짐하다는 뜻에서 평택이라고 불렸습니다. 서해에 접한 평야지대인 데다 삼남대로가 지나는 요충지여서 역과 원이 많았고, 고려시대 때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해 성이 많이 축조됐습니다.

 

해안을 간척해 땅을 넓히다

평택에는 두 개의 방조제가 있습니다. 1973년에 건설된 아산만방조제와 1974년에 완공된 남양만방조제입니다. 아산만방조제로는 ‘물오리도 발이 비뚤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물살이 거세 목숨을 걸고 지났던 안성천 하구 뱃길이 교통의 요충지로 거듭났고, 남양만방조제로는 2,285ha의 간척지가 생겨 어려운 시절 쌀 생산량 증대에 기여했습니다. 아산만방조제로 만들어진 아산만 일대에는 호수와 바다를 함께 즐길 수 있는 평택호관광단지도 있습니다.

 

 

 

 

 

 

세계로 웅비하는 평택항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에 있습니다. 경기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에서 충남 당진시 송산면 성구미리 동쪽 끝에 이르는 규모로, 1986년 12월에 국제무역항으로 개항했습니다. 이후 2001년 8월에 국제여객터미널로 기능이 확장됐습니다. 지금은 수도권과 중부권의 관문으로, 우리나라와 중국,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종합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평택항홍보관을 찾으면 21세기 동북아시대 종합무역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평택항의 역사와 미래 비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평택의 인물과 숨겨진 명소

 

[박문수]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암행어사로, 숙종 17년(1619)에 외가인 진위에서 태어났습니다. 영조 3년(1727)에 영남지역의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1731년에 호남지역 어사로 나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 힘썼습니다. 평택에 남아 있는 유적은 거의 없고, 천안에 그의 묘와 관련 유적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조광조]

중종반정 후 조정에 출사해 유교적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으나 기묘사화로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현재 그를 기리는 사당인 충의각이 그가 유년기를 보낸 이충동에 있는데, 이충동은 ‘두 명의 충신이 살았던 동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두 충신은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 조광조와 인조 때 3학사의 한 사람인 오달제를 말합니다.

 

[심복사]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에 있는 사찰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사찰로 전해집니다. 대적광전에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보물 제565호로 지정돼 있는데, 이 불상에는 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고려 말에 파주군 몽산포에 살던 천노인이 덕목리 앞바다에 그물을 쳤다가 불상을 건져 올립니다. 버리고 버려도 다시 걸려 올라와 지게에 싣고 불상 모실 곳을 찾아 헤매다, 지금의 자리에서 갑자기 무거워져 이곳에 절을 지어 모신 것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