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가히 만세에 나라를 이어갈 만한 터전이었으니

영릉은 천하의 명당으로 전해집니다. 영릉으로 조선왕조의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됐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예종 때였습니다. 왕의 명을 받고 세종의 새로운 능지를 물색하러 나섰던 지관과 정승들이 여주 북성산(영릉의 주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비 피할 곳을 찾던 중 연기가 나는 곳이 있어 가보니 그곳에 재실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한눈에 보기에도 ‘가히 만세에 나라를 이어갈 만한 기가 탄생할 자리였다’ 전해집니다.

 

‘검은 말’을 뜻하는 ‘여’에서 비롯된 이름 ‘여주’

고구려 때는 ‘골내근현’이라고 불렸습니다. 이후 황려, 여흥을 거쳐 고려 우왕과 공양왕 때는 부에서 군으로 승격과 강등을 거듭했습니다. 1469년 세조릉이 여주로 천장되면서 여주목으로 승격, ‘여주’라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택리지>에 따르면 남한강 가에 있는 바위에서 황마와 여마가 솟아나 ‘황려’라는 이름을 얻었고, 이중 ‘검은말’ 을 의미하는 ‘여’에서 여주라는 이름이 비롯됐습니다.

 

 

 

 

 

 

남한강을 통한 물류가 크게 발달했던 곳

여주는 남한강을 중심으로 발달했습니다. 수로 교통이 중심이던 조선시대에는 이포나루와 조포나루가 한강의 4대 나루로 손꼽힐 만큼 큰 물류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정선에서 올라오는 떼배와 강원으로 가는 소금배가 교차하며 두 나루를 지났고, 여주에서 생산된 자채쌀과 도자기가 이곳을 통해 한양으로 실려 나갔습니다. 세조 때는 단종이 눈물을 흩뿌리며 이포나루를 지났고, 일제강점기 때는 여주와 양평의 곡물들이 이포나루를 거쳐 인천으로 운반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왕가의 혼이 깃들어 더 보배로운 땅

고려와 조선에 걸쳐 9명의 왕비가 배출됐습니다.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와 숙종 비 인현왕후, 영조비 정순왕후, 고종 비 명성황후 등이 그들입니다. 한양이 가깝고 물자가 풍부해 이곳에 터를 마련한 명문가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주 땅에는 세종대왕과 효종대왕, 그리고 그들의 비인 소헌왕후와 인선왕후가 능선 하나를 이웃해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강을 따라 펼쳐진 역사와 문화의 도시, 여주

 

[파사성]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900여m 이어진 삼국시대 이래의 산성입니다.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평야와 구릉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륵사]
전국의 절 가운데 드물게 강변에 지어진 사찰입니다.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유추)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으로, 영릉의 원찰이 돼 잠시 보은사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경내에 총 7점의 보물과 유형문화재 1점이 있는데 이중 다층전탑과 조사당, 강월헌 등이 눈길을 끕니다.

[고달사지]
여주는 남한강을 따라 큰 절들이 줄지어 들어섰던 곳입니다. 고달사지도 그 중 하나인데, 호방했던 고려시대 선문의 정신과 면모를 알수 있는 뛰어난 문화재가 많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세종대왕릉은 조선왕릉 최초의 부부합장릉입니다. 1469년에 능서면으로 천장했고 능역 앞에 1977년에 건축된 세종전이 있습니다. 세종대왕릉과 능선 하나로 이어진 효종대왕릉은 1673년에 양주에서 이장한 것으로, 해학적인 표정의 석호들이 능침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명성황후 생가 터]
고종황제의 비 명성황후가 태어나 여덟 살 때까지 살던 집으로, 생가(복원) 앞에 각종 자료와 유품 등이 전시된 기념관이 있습니다. 가까이에는 역대 여흥 민씨 왕비들이 머물렀던 감고당도 있습니다.

[여주도자세상]
생활도자에서 예술도자까지 각양각색의 도자기를 감상하고 체험하며 구입할 수 있는 국내 최초의 원스톱 도자 쇼핑 문화 관광지입니다. 생활 도자에 예술적 감각을 입힌 작품을 전시하는 반달미술관과 아트숍, 리빙숍, 브랜드숍, 갤러리숍 등 4개의  생활도자 매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