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 ‘통일 한국’의 미래를 빛낼 길지이로니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인 1612년(광해군 4년)의 일입니다. 풍수가 이의신이 왕에게 “한양의 국도는 지기(地氣)가 쇠하고 교하현이 길지(吉地)”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이에 광해군은 교하지역의 형세를 살피는 등 파주로 천도할 계획을 세웁니다. 대신들의 반대로 끝내는 무산되고 말았지만 파주 교하는 이후로도 계속 ‘도읍지로 삼을 만한 길지’로 주목받았습니다.

 

둑과 제방이 많은 마을

고구려 때는 술이홀현이라고 불렸습니다. 1459년에 목으로 개편되면서 ‘둑과 제방이 많은 마을’이란 뜻의 파주로 불렸습니다. 칠중하라 불리던 임진강을 비롯하여 공릉천, 문산천, 갈곡천, 비암천 같은 크고 작은 강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파주 전역으로 유통이 발달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습니다. 그중 임진강변에 있는 고랑포와 문산포가 물류집산지로 번성했습니다.

 

 

 

 

 

 

한반도 남북을 잇는 교통요충지

파주는 본래 고조선의 땅이었다가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습니다. 이후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이었다가 고구려에 예속됐고, 진흥왕 때 신라 땅이 됐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개성·의주로 가는 길목에 있어 파발과 역참·뱃길이 발달했고, 지금은 북한과 유일하게 연결되는 판문점이 있는 교통 요충지로, 통일을 준비하는 남북 교류의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통일 한국의 심장

파주는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북한과 마주한 땅입니다. 155마일의 군사분계선이 그어진 기점(장단면의 동장리)이고, 휴전이 협정된 곳(진서면 어룡리 판문점)이며, 오두산 통일전망대와 임진각·도라산전망대·제3땅굴 등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남북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평화특구이기도 합니다.

 

 

 

 

 

 

 


역사와 예술이 숨 쉬는 도시, 파주

  [삼릉]

봉일천리에 있는 공릉과 순릉· 영릉을 통칭해 부르는 이름으로, 1970년에 사적 제205호로 지정됐습니다. 공릉은 조선 예종의 원비인 장순왕후 한씨의 무덤이고, 순릉은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한씨의 무덤이며, 영릉은 영조의 첫째 아들인 진종(사후 추존)과 부인 효순왕후 조씨의 무덤입니다.

 [보광사]

신라 진성여왕 8년인 894년에 왕명에 따라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입니다. 이후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다 1740년에 ‘소령원’이 만들어지면서 이곳의 능침사찰이 됐습니다. 소령원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무덤입니다. 대웅전 뒤편으로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신 어실각이 있고, 그 전각옆으로 영조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습니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고려시대에 천연바위벽을 이용해 만든 석불입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시대 자식이 없던 선종과 원신궁주가 이 바위에 불상을 새기게 한 후 왕자 한산후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1963년에 보물 제93호로 지정됐습니다.

 

[ 감악산 출렁다리]

2016년 9월에 완공됐습니다. 국내 최초의 곡선 현수교로, 길이는 150m이고 폭은 1.5m입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출렁거리는 다리 아래로는 설마천 계곡이 까마득하고, 멀리 시선이 닿는 곳으로는 산봉우리가 겹겹입니다. 이 다리는 ‘글로스터 영웅다리’라고도 불립니다. 6·25전쟁 당시 영국의 글로스터 부대원들이 설마리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낸 공적을 기리기 위해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