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미진•참조 조소앙기념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중문화협회•사진 한중문화협회
조용은 선생은 1887년 4월 경기도 교하군 월롱면(현 파주시)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만 15세의 나이로 성균관 경학과에 입학해 유교경전과 만국사물기원역사 등을 익힐 정도로 명석했다.
그의 최초 독립운동은 성균관 재학 시절 시작됐다. 1903년 이하영 등 친일정부 관료들이 황무지 개간권을 일본에 넘기려 하자 신채호·유인식 등과 함께 성토문을 작성해 반대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듬해 3월 러일전쟁의 시작과 함께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선생은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부립제일중학교와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 등을 거치며 근대 교육을 받던 그 무렵, 선생은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탄(强制竝呑) 반대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1913년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상하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 등과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뜻을 모았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무오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
이후 선생은 중국·유럽·소련 등 세계 각국에서 외교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국제사회당대회가 개최되자 스위스에서 한국 독립의 승인안을, 네덜란드에서는 한국독립문제 실행 요구안을 제출해 참가국들의 동의를 받아냈다. 그의 이러한 외교활동은 1943년 카이로선언과 1945년 포츠담선언을 통해 국제적으로 대한의 독립을 보장받는 데 큰 힘이 됐다.
하지만 독립운동 세력에 대립과 분열이 생기기 시작하자 선생은 각 단체의 단결과 통합을 위해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제창한다. 1919년 2월 우리나라가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고 무장투쟁을 독립운동의 계책으로 제시한 무오독립선언서 또한 삼균주의에 기초했다. 1930년 1월 한국독립당 창당을 주도한 선생은 당의와 강령 제정을 위한 기초위원으로 선임돼 삼균주의에 기초한 독립운동 이념도 제시했다.
선생은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귀국해 삼균주의가 실현되는 국가 건설 작업을 본격 추진해 나갔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통해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 또는 국가 간에 완전한 균등을 실현한다는 삼균주의는 민족주의 국가 건설의 기본계획과 방향을 제시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기본이념이었다.
하지만 6·25전쟁 중 선생이 납북되면서 ‘균등’을 내세운 삼균주의도 함께 잊어져 갔다. 선생은 1958년 9월 평양에서 서거했다.
선생은 비록 삼균주의를 후대에 계승하지 못하고 떠났지만,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또한 선생이 유년 시절을 보낸 경기도 양주 황방리에는 그를 기리고 추모하는 ‘소앙기념관’이, 독립기념관 경내에는 삼균주의 어록비가 세워져 그의 정신을 길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