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빛깔을 한국의 아름다움으로 담다

바다의 빛깔을
한국의 아름다움으로 담다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4호
배금용 나전칠기장 생칠장 보유자

나전칠기는 영롱한 조개껍데기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소중한 이에게 보내고 싶어서 태어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조개껍데기를 종잇장보다도 더 얇아질 때까지 갈고 그 ‘종이’마저 작게 조각내 꽃을 피워 냈으니, 그 마음이 어찌 작을 수 있을까. 이 정성을, 이 미적 감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꽃을 피워 내고 있는 배금용 선생에게 나전칠기는 하나의 사명이다.

글 강나은•사진 황운하

화려한 작품 뒤 숨겨진 고생길

성남시민속공예전시관에 들어서면 영롱하게 빛나는 모습으로 가득찬 배금용 선생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씩밖에 없다는 고려시대의 나전칠기를 재현한 작품이 바로 이 전시관에 있다. 이렇게 화려한 작품 뒤에는 배금용 선생의 굴곡진 세월이 숨겨져 있다.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뒤로 그는 고아원에 맡겨졌다. 고아원에서 도망쳐 무작정 고향을 찾아 걸었다. 일해 주면서 밥을 얻어먹고 밤에는 멍석을 깔고 자던 그가 드디어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그를 찾아온 삼촌을 만나 서울 마포 산동네로 오게 됐다. 이어 그는 삼촌 집 바로 뒤에 살던 고 최준식 선생에게서 나전칠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열한 살 때였다.

“5년을 일했는데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알려줬어요. 알아서 자기가 연구하고, 요령껏 배우는 거죠. 기존에 있는 일꾼들이 다 나가고 나서야 알려주셨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정통으로 일을 배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나전칠기 전통기술을 더욱 세밀하게 가다듬었고, 그 결과 1987년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입선에 이어 1998년에는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4호 나전칠기장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 그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돈을 따라가면 작품이 나올 수 없다’는 고집을 지켜 나가고 있다.

“내일 굶어죽을망정 돈 벌려고 작품을 만들 수는 없지요. 이 작품들은 일 년에 몇 개 못 만들어요. 판매하려면 더 많이 만들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엉터리로 만들어져요. 쌀만 안 떨어지면 되죠. 더 많이 바라면 욕심이라 생각합니다.”

옛 전통이 그 가치를 인정받는 미래를 기다리며

나전국당초문경함은 고려시대 유물이지만, 우리나라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팔만대장경 두루마리 아홉 개가 들어가는 이 문경함을 만들기 위해서는 머리카락보다도 얇은 자개를 한 땀 한 땀 붙여 무늬를 만들어야 한다. 현재는 국립박물관에 모작이 전시돼 있는데, 이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배금용 선생 한 명뿐이다.

이렇게 힘을 들여 ‘국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아들이 전수자가 되면서부터였다. 자신만의 독창성이 있어야 아들에게 그 기술을 물려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국보 재현에 뛰어들었다. 그 뒤로 밤을 새워 가며 만든 작품이 전승공예대전에서 입선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제가 학교를 다니면서 상장 한 번을 타 본 적이 없어요. 신문에 날 일도 없었죠. 그런데 상장도 받고, 신문에도 났잖아요. 자다가도 일어나서 웃고, 세수하다가도 웃고, 걷다가도 웃음이 났어요.”

한편 아들인 배광우 전수자는 용인대학교 전통 공예보존학과에서 본격적으로 나전칠기를 공부하면서 작품의 정확한 수치부터 꽃무늬의 꽃잎 개수까지 세세하게 연구해 배금용 선생의 국보 재현을 도왔다.

배금용 선생은 다음 세대가 돼서라도 언젠가는 나전칠기가 옛 전통이 아닌 자랑스러운 작품으로 인정받길 기다리면서 오늘도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