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민과 청렴으로 민생의 행복을 꿈꾸다

다산 유적지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다산 정약용 선생.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그의 생가 여유당은 실용 학문의 발전과 민생의 행복이 곧 부강한 국가로의 지름길이라던 다산 선생의 정신을 그대로 담은 곳이다. 새로운 회기와 함께 민생을 되새기던 2월, 경기도의회가 여유당을 찾았다.
정별님   사진 김정호
애민정신과 청렴한 삶 다산의 정수를 모아 두다
정치와 경제, 문학과 철학뿐 아니라 건축학, 의학, 군 사학,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를 연구하며 5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하고 배다리와 거중기를 발명한 조선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산 정약용선생. 다산 유적지는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냈던 생가인 여유당과 다산 선생묘, 사당인 문도사가 보존된 곳이다. 다산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두강(斗江)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실개천인 소천의 끝 자락, 한강과 마주한 형태로 위치하고 있다. 혹자는 두 물이 아우러져 한 물로 흐르는 듯한 모양새가 그가 펼쳤던 학문이자 사상인 실학(實學)의 운명과 닮아 있다는 의견을 내기도 하였다. 다산은 한강을 열수(洌水)라고 부르고 자신의 호도 열수옹(洌水翁, 한강에 사는 노인이라는 뜻), 열초(洌樵)라고 칭할 정도로 한강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며 한강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발견하였다.다산의 거대한 담론 또한 한강에서 출발해 한강에서 완성되었다.
다산은 힘든 유배 생활 속에도 경세학을 연구하며 방대한 저서를 집필하는 등 일생을 백성을 위한 사회제도 개혁과 부패척결을 위해 힘썼다. 다산의 크고 작은 업적들과 그의 저서들은 유적지 내에 위치한 다산 문화관과 다산 기념관에 잘 정리되어 있다.유적지를 돌아보 기전 먼저 문화관과 기념관에 들러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업적과 자취를 느껴 보는 것은 어떨는지.

겨울의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며 사방에서 지켜보는 듯 경계하라, 여유당
유적지 입구에서 곧장 걸어 들어가면 다산의 생가여 유당(與猶堂)이 보인다. 정조 24년인 1800년, 다산은 모든 관직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돌아와 생을 정리하는 순간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여유(與猶)란 ‘겨울의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뜻이다. 다산이 당호를 이렇게 지은 데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고향으로 내려오기 직전 해인 1799년엔 그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극에 달해 있었다.이해는 정조의 충직한 신하였던 번암 채제공 선생이 돌아가신 해이기도 했는데, 이 무렵 정조는 다산을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다. 노론은 다산이 제2의 채제공 선생이자 재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판단,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자 그의 형인 정약전을 공격해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고, 당시엔 가족이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면 다른 가족도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다. 다산은 정조의 만류에도 이듬해 결국 사직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다산은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미완으로 남아 있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여유당에 돌아와 완성하였으며, 잘 알려진 ‘흠흠심서(欽欽新書)’와 ‘아언각비(雅言覺非)’ 또한 이 시기에 집필하였다. 또한 석천 신작(申綽), 대산 김매순(金邁淳), 연천 홍석주(洪奭周)등의 문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했다.
여유당을 천천히 둘러본 뒤 오른편으로 돌아 나오면 작은 동산 형태의 다산 묘소가 위치해 있다. 그는 여유당에서 세상을 떠났고 집 뒷산에 묻혔다. 묘소에 오르면 여유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훌쩍 고향마을 돌아와 보니
문 앞에 봄강물 즐펀히 흐르는구나
(중략)
꽃은 따사롭고 수풀 속 정자는 고요한데
소나무 드리워진 들길은 그윽하구나
남쪽지방 수천 리를 노닐어 보았지만
이만한 언덕을 다시 못 찾겠더라

-환초천거(還苕川居)


정치 지도자가 걸어야 할 바른 길을 민생의 편에서 제시하다
다산 학문의 근저에는 백성을 근본으로 여기는 자세와 애정이 있다. 그가 남긴 시문에는 당시 백성들의 피폐하고 참혹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암행어사로 재직하던 시절 핍박 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면서 부패한 권력과 폭정에 대해 느낀 강한 경각심은 이후 백성의 주체성과 권리를 각성시키기 위한 각종 정책의 시발점이 되었다.
다산의 저서 ‘목민심서’는 관리의 책임과 의무는 그 어느 것보다 무겁고 냉정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반영된, 쉽게 말해 공무원을 위한 지침서다. 수령으로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6전 12부에 나누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방관의 도덕적인 자세와 현행법을 전제로 하는 올바른 행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저서인 ‘흠흠신서’ 또한 법의 집행에서 억울한 백성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다산의 애민정신과 민본사상은 단순히 저서나 주장에 그치지 않고 학문과 실천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더욱 높다. 다산이 매진했던 실학(實學)은 실증과 실용이라는 목적을 추구하는 학문이었다. 배다리, 거중기와 같은 발명은 기예나 기계를 이용해 실용성을 높이고 의술과 공업이 정교해질수록 나라가 부강해져 백성들이 풍요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바탕에 둔 것이다. 그는 신분제도와 서얼제도 철폐에 앞장섰고, 능력 위주의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폐단과 부패로 어지러운 봉건 시대에 핍박 받는 민생의 편에 서고, 백성을 위한 각종 사회제도 개혁을 주장하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
“임금은 백성을 위하고, 군자는 자신을 바로 세운 뒤에 남을 다스려야 한다”던 그의 생각이야 말로 오늘날 정치 지도자가 걸어야 할 바른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