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장릉은 왕의 무덤이지만 동시에 자연 학습의 장이기도 합니다. 길을 걷다 보면 저수지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오리 떼도 만날 수 있고, 오래된 아름드리나무들이 만든 울창한 숲도 지나게 되지요. 그 길 끝에서 장릉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비밀의 화원에 숨겨진 보물 같아요. 자연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우리 왕릉의 우아함을 만끽할 수 있답니다.
장릉은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그의 부인 인헌왕후 구씨의 무덤입니다. 원종이라는 이름이 낯설다고요? 원종은 왕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인물이에요. 원종은 원래 정원대원군(왕의 아버지)으로 추존됐으나 인조가 할아버지(선조)-아버지(정원군)-자신으로 왕위가 이어졌다는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숭을 강행해 왕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원종의 무덤은 사실 처음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에요. 양주군에 있다가 인조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고 왕으로 추존되면서 비로소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았습니다. 원종과 혼인 후 세 아들, 즉 인조·능원대군·능창대군을 낳은 인헌왕후 역시 남편이 정원군에서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왕비가 된 경우이지요.
원종의 일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 선조 곁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고 극진히 모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선조가 왕자인 자신을 피신시키려 하자 울면서 “이대로는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고, 선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곁에 두었다고 합니다. 원종은 40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는데, 셋째 아들이 내란죄로 억울하게 유배를 가 자결하면서 얻은 울화병 때문이었습니다. 왕이 된 아들을 보는 기쁨보다 억울하게 죽은 아들을 지켜보는 아비의 비통한 심정이 더욱 컸던 거죠.
피톤치드를 만끽하며 숲길을 천천히 걸어봤습니다. 김포는 넓은 평야로 유명한 지역이라 산이 매우 드문 곳입니다. 특히 도심에서는 여기 장릉산이 유일하지요. 숲으로 둘러쳐진 조선의 왕릉답게 이곳도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신비롭고 안정적으로 보전돼 왔습니다.
한참을 걷다 보면 홍살문에 다다릅니다. 붉은색이 칠해진 이 문은 악귀를 물리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홍살문을 지나면 정자각과 비각 두 채가 나란히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뒤로 멀찌감치 자리 잡고 있는 왕릉과 왕비릉은 의외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부속건물들과 나뭇잎들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실 여기에는 우리 조상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답니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봉분에 대한 폐쇄성을 높인 것이지요.
천천히 쌍릉으로 다가가 보았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좋으련만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답게 보호 울타리가 쳐져 있습니다.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보존하려는 조치이니 감수해야겠지요?
장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돼 있지 않습니다. 대신 봉분 아래로 얕은 호석만 둘렀는데, 이는 추봉된 다른 왕릉의 전례를 따른 것입니다. 한 발짝씩 걸을 때마다 조선 왕조의 역사를 떠올려 봤습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을 되새기며 조상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도 깊게 생각해 봤습니다. 언제 와도 좋은 왕릉의 산책. 우리 경기도민이 누릴 수 있는 멋진 혜택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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