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찬란한 문화의 힘을 느끼다|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Part 2.] 찬란한 문화의 힘을 느끼다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여주에는 대한민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세종대왕과 그의 비 소헌왕후의 영릉(英陵)이 있습니다.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가 묻혀 있는 영릉(寧陵)도 있습니다.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이 우리 문화의 힘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는 요즘, 그 중심에는 바로 우리 세종대왕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동법과 상평통보 발행으로 경제시책에 업적을 남긴 효종 또한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겠죠? 문화와 경제의 힘을 보여준 두 임금의 능을 소개합니다.

진달래 동산과 왕의 숲길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아름다운 주변 풍경 덕분에 그 자체로도 거닐 만한 가치를 지닌 곳입니다. 세종대왕의 능과 바로 인근에 자리 잡은 효종의 능을 잇는 ‘왕의 숲길’은 들숨날숨마다 편안한 여유를 갖게 해주지요.

여기에 여주 영릉에는 작은 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매년 봄마다 한시적으로 개방하는 ‘진달래동산’이 바로 그것입니다. 봄날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출입이 허용되는 이곳은 그야말로 분홍색 진달래가 한가득 피어 장관을 이룹니다. 꽃피는 날짜에 따라 개방되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미리 알아보는 작은 수고만 감수한다면 이 행복은 누구나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여주 영릉들을 살펴보면,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가 함께 묻힌 무덤입니다. 1970년 5월 사적 제195호로 지정됐지요. 영릉은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입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이고 서쪽 방은 세종대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뒤 1450년 세종이 세상을 떠난 후 합장했습니다.

효종과 그의 비 인선왕후가 묻혀 있는 영릉(寧陵)은 1659년에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 자리에 병풍석을 갖춰 조영했는데,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해서 1673년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효종의 능을 이장한 다음해에 인선왕후가 사망해 왕릉 앞에 비릉을 써서 앞뒤로 나란히 쌍분을 이루게 하고 봉분 내부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으로 했습니다.

세종과 효종의 달랐던 삶

세종대왕은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조선을 통치했습니다. 31년이 넘는 동안 그가 남긴 업적은 혁혁했습니다.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를 키웠고, 학문을 일으키고 번성시켜 유교정치의 기반을 마련했지요. 그는 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다른 군주였습니다. 알기 쉬운 훈민정음을 만든 것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대왕이 만들어 낸 산물이었죠.

소현왕후는 평소 어진 인물이었고 세종대왕과의 금실 또한 남달랐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소현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세종대왕은 이를 매우 슬퍼했다고 합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던가요. 세종대왕은 안팎으로 백성과 관료의 모범이 된 군주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효종은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점잖은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병자호란 때 아버지인 인조가 청나라에 굴복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이후 볼모가 돼 중국 선양(瀋陽)으로 끌려갔지요. 이 때문에 그는 평생 동안 북벌을 꿈꾸고, 이를 위해 군사력과 경제를 키웠습니다. 인선왕후 역시 지아비를 도왔습니다. 그는 금주령을 내리고 이불의 색을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통일해 전시에 군복으로 쓸 수 있도록 했지요. 이렇게 준비된 재원은 모두 북벌 계획에 사용됐다고 합니다.

방법은 달랐지만 모두 ‘강한 조선’을 꿈꿨던 두 명의 왕과 왕비. 그들이 있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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