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집] 우리 역사 속 경자년 이야기

“우리 역사 속 경자년 이야기”

우리 역사 속 경자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경자년에 일어났던 주요 사건들을 살펴보자.

글 정덕현
참조 우리역사넷·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전  

1420년 세종대왕의 집현전 설치

1420년 경자년에는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설치했다. 물론 집현전 같은 기능을 하던 기관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지만 제 기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1399년 조박(趙璞)이 집현전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후 여러 번 건의가 있었지만, 비로소 집현전이 본격 설치되고 기구가 확충된 것은 1420년에 이르러서였다.

세종대왕은 경복궁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정1품 영집현전사, 정2품 대제학, 종2품 제학을 비롯해 부제학, 직제학, 직전 등의 직책을 임명했다. 설치 초기 학사 숫자는 10명이었으나 차츰 늘어 1435년에는 최고 32인까지 이르렀다가, 이듬해인 1436년에 20인으로 축소 고정되었다. 집현전은 이후 37년간 존속했고, 성종 대에 홍문관이 설립되면서 그 역할이 계승됐다.

비교적 짧은 시간 존속했지만 집현전의 역사적 가치와 의의는 크다. 집현전은 도서와 연구의 중심 기관이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종실록> <세종실록> 등의 역사서는 물론이고 글을 모르는 백성들도 그림을 통해 유교 윤리를 깨우칠 수 있는 <삼강행실도>, 또 <훈민정음 해례> <용비어천가 주해> <사서언해> 등을 편찬했다.

세종 대의 이러한 업적은 후대로 이어져 성종 대까지 집현전 학자들이 대부분 조선의 정책을 수립했고, <경국대전>과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전기의 주요한 업적을 이뤄냈다. 1420년 경자년에 이루어진 세종대왕의 집현전 설치는 조선의 정치 체계와 문화의 기틀을 잡는 전기적인 사건이었다.

1900년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반포

경자년에 이루어진 또 하나의 사건은 고종 황제가 내린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반포다. 1900년 경자년 10월 25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울릉도와 죽서도(竹島) 석도(獨島)를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울도군을 설치한다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제정했다. 그 내용은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로 개정하는 건이었다. 울릉도의 명칭과 직제에 관한 내용 같지만, 실상 거기에는 더 깊은 뜻이 있었다.

특히 제2조에서 명시한 ‘울도’의 범위가 울릉전도와 부속 섬인 ‘죽도’와 ‘석도(독도의 이전 명칭)’를 포함한다는 부분, 그리고 제4조에서 실제적인 세금의 집행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에 의거해 울릉도는 독립된 ‘군’으로 격상돼 울릉도·죽도·독도를 관장하는 지방 행정기관이 됐고, 울릉도 도감이던 배계주가 울도군 초대 군수로 임명됐다. 이는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선언적 주장보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증거가 되는 사항이었다.

1900년에 반포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가 게재된 ‘관보’ (도서 <독도의 진실>에 소개). 소담출판사 제공

당시 칙령 41호 반포에는 국제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당시 울릉도에는 수백 명의 일본인이 집단으로 불법 침입해 촌락을 이루었고, 울릉도의 삼림을 벌채해 일본으로 이송하고 있었던 것. 이에 1899년 울릉도의 산림 채벌권을 가진 러시아가 이를 금지해 달라고 외교문서를 통해 항의했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조사단을 파견해 일본인의 불법 실태를 조사하고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행정 관리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칙령을 반포했다.

이 칙령에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울도군의 군수 관할 지역에 석도, 즉 현재의 독도가 포함됐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이 관제 개정을 중앙 <관보>에 게재해 전 세계에 알렸다는 점이다. 즉 칙령 반포는 서양 국제법 체계에서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공표한 정치적·외교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따라서 일본의 얼토당토않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 1900년의 칙령 반포는 독도가 우리 땅임을 명시하는 중요한 증거이자 독도수호운동의 기준점이 되고 있다.

1960년 4·19혁명

1960년 경자년은 4·19혁명이 일어난 해였다.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개표 조작을 한 이른바 3·15부정선거가 그 표면적인 촉발점이 됐지만,사실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이승만 독재정권의 누적된 부패정치가 근본적인 원인이 돼 일어난 혁명이었다.

3·15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돼 마산에서 규탄시위가 벌어졌고, 시위에 참여한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실종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사실이 부산일보에 보도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이후 대학교수들의 시국 선언이 이어졌고,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이어 4월 19일에는 중·고등학생들이 경무대로 몰려가 대통령의 면담을 요구했고, 오후 3시에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무장 시위가 이어지고 4월 25일에는 교수단의 데모, 주한미국 대사의 하야 권유 등이 이어졌다. 결국 4월 26일 오후 1시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에서 하야를 발표했다.

“부정선거 무효”라는 구호로 시작돼 반독재 투쟁으로 이어진 4·19혁명의 의미는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경험을 갖게 됐다는 점이다. 1960년 경자년에 있었던 민주주의의 소중한 경험은 이후 1987년 민주화 운동과 2016년 촛불혁명으로 계속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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