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김현탁 (소설가)
경수는 유망했던 전자부품 사업에 실패하고 몇 달째 술로 지새고 있다. 그놈의 핸드폰 부품이 불량 나지만 않았더라도 잘 나가던 사업이었는데, 불량 클레임을 변상해 주고 나니 빈털터리가 됐다. 하는 일이라곤 날마다 친구를 불러내 술을 얻어먹는 일뿐이었다.
‘오늘은 누구에게 술을 얻어먹을까’ 전화번호부를 뒤지며 술 마실 대상을 찾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 휴대폰이 아닌 가정집이나 회사 번호였다.
“여보세요.”
경수는 얼른 전화기를 들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누구시죠?”
경수가 다시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아, 네. 전화를 잘못 걸었습니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잘못 걸었으면 말을 할 것이지, 그렇게 대답을 늦게 할 건 뭐야’ 경수는 투덜거리며 다시 전화번호를 뒤졌다.
며칠이 지났다. 오랜만에 대학 동기생 친구를 만나 소주 한 잔 걸치며 대학시절 얘기를 나눴다. 술은 취해 있었고 이야기에 열중하다 보니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화장실에 가면서 괜히 전화기를 들여다봤다. 웬일로 두 통의 전화가 와 있었다. 그런데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그것도 휴대폰 번호가 아니었다. ‘누굴까…’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전화번호였다. ‘누구였지?’ 경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옳지, 얼마 전 잘못 걸려온 전화번호 같았다. 하지만 정확하게 번호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경수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
경수는 두 번이나 ‘여보세요’를 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잘못 걸린 전화인 것 같아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 죄송해요. 서울 전화번호를 누른다는 게 그만.”
“그렇군요. 그런데 혹시 지난번에도 잘못 걸지 않았습니까?”
“네, 맞아요. 거듭 실수를 해서 죄송해요.”
그렇게 말했지만 경수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녀가 또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 혹시 성함이 최… 경수 씨 아닌가요?”
경수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깜짝 놀랐다.
“맞는데, 누구시죠?”
“어쩐지… 혹시나 하고 확인했는데 맞네요! 반가워요. 저 기억 못하시겠어요?”
“네. 누구신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하긴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네요. 고등학교 때 남한강에서 저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신데.”
아! 경수는 그제야 기억이 났다. 대학교 때 남한강에 놀러 갔다가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여학생을 구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일로 몇 번이나 편지를 받고 데이트도 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경수는 군 입대를 하고 소식이 끊겼다.
“아직도 좋은 일 많이 하고 계세요?”
“아, 아뇨.”
“참 좋으신 분이었는데…. 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한 번 뵙고 싶어요.”
“그런데 결혼하셨잖아요.”
경수는 버럭 겁부터 났다. 남편이 있을 텐데.
“결혼은 물론 했죠. 그런데 몇 년 전에 먼저 하늘나라로 갔어요.”
그녀의 말속에 한숨이 배어 나왔다. 경수는 잠시 하늘을 쳐다봤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방울방울 솟아올랐다. 경수의 아내도 몇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경수는 아내의 해맑은 웃음을 떠 올리다 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안됐군요. 실은 저도 몇 년 전 아내를 먼저 보내고 혼자 있습니다.”
“어머, 동병상련이네요. 삶이란 참 덧없죠. 저도 그때 선생님 아니었으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텐데…. 그땐 어려서 제대로 보답도 못해드렸네요.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어쨌든 반갑고 고마워요. 이젠 제가 그 보답을 해야 할 때인 것 같아요.”
경수의 눈이 번쩍 빛났다. 보답? 재미있는 일이군.
“아, 네. 그걸 뭘… 까마득한 옛날 일을 가지고. 여하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 되시면 내일 뵙기로 해요.”
“그, 그래요. 그런데 어디서 뵙죠?”
“서울에서 만나요. 종로 3가 뒷골목 ‘별빛 머문 고향’이라는 카페가 있어요. 제 전화번호 찍어 드릴게요. 잘 모르시면 그 근처에서 전화 주세요.”
경수는 어깨에 힘이 솟았다. 화장실에서 돌아와 친구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들어가야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집에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경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끼던 양복을 입고 머리 손질도 정성스럽게 한 후 서울로 향했다.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까마득했다.
‘별빛 머문 고향’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베이지색 투피스에 얇은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모델처럼 앉아 있었다. 한눈에 봐도 눈이 부셨다. 경수는 애써 놀란 눈빛을 감추며 자리에 앉았다.
“어머, 어쩜! 늙지도 않으셨네. 옛날 모습 그대로예요.”
그녀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경수를 맞았다.
“고맙습니다. 제가 보기엔 옛날보다 더 미인이 되셨습니다. 반갑습니다.”
경수는 그녀와 와인을 마시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최근에 실패한 사업 이야기도 솔직하게 말했다. 경수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첫 만남인데도 도와주겠다고 했다. 둘은 시간 가는 줄 몰랐고, 한참을 이야기를 하다 밖으로 나왔다.
밖은 어둠이 짙게 내려 있었다. 하늘에는 별들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별들은 반짝반짝 빛을 내뿜으며 경수의 머리 위로 한 폴 한 폴 날아들었다. 경수는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고 별빛 속을 한없이 걸어갔다. 별들의 박수소리가 경수의 귓가에 백합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