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팔도의 물건들이 모여들던 문화의 접경지대였으니

“경상, 전라, 충청도의 물산이 모여 서울로 이송되는 길목이다.” <허생전>을 쓴 연암 박지원이 안성을 두고 한 말입니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 또한 “안성은 경기도와 호남 사이에 위치해 화물이 모이고 상공인들이 모여 서울 남쪽의 도회지가 됐다”라고 말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발간된 <개벽> 잡지에도 전국 3대 장시로 안성장이 꼽혔고, “안성장은 서울장보다 두세 가지가 더 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물산이 모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안성이 상업도시로 크게 발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탈 없이 편안한 성

삼한시대 진한에 속했으며, 369년 백제가 마한 전역을 차지했을 때 백제의 영토가 됩니다. 이후 고구려 땅에 예속되면서 ‘내혜홀’로 불렸고,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백성군’으로 개칭됐습니다. 이때 안성군이란 지명이 <삼국사기-지리지>에 처음 등장하는데, ‘위태로움이 없고 편안하며 탈 없는 성곽’이란 뜻에서 이름 붙었습니다. 1413년 전국을 8도로 나눌 때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됐고, 1914년 안성, 죽산, 양성 3개 군을 통합해 안성군이 됐습니다.

안성맞춤의 고장

안성은 충남을 관통해 서해로 향하고, 경기남부를 지나 서울로 향하는 교통 요충지여서 예부터 장시(상업)가 활성화됐습니다. 장이 발달하면서 유기와 연죽(담뱃대), 가죽꽃신, 한지 같은 수공업이 발달했는데, 특히 망치로 두드려 만드는 ‘방짜 유기’의 명성이 대단했습니다. 한양 양반가의 주문을 받아 ‘모춤(맞춤)’하는 방식이었는데, 그릇이 견고하고 광채가 뛰어나 사람들의 기호에 잘 맞았다고 합니다. 이에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하자 전문 연희패들의 활동도 활발했습니다. 안성바우덕이패가 그중 가장 유명한 연희패였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군사적 요충지

‘산은 동북쪽을 막아서 저절로 성이 되고, 지세는 서남으로 트이고 기름진 벌판이 질펀하다.’ 조선시대 문인 최부가 안성을 두고 쓴 시입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안성은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의 각축장이었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외세에 맞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습니다. 당연히 여러 개의 산성이 쌓였습니다. 이는 안성 사람들이 동네 어귀마다 미륵불을 세워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안성 땅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미륵불이 남은 연유입니다.


예술과 문화가 꽃피는 도시, 안성

 

[죽주산성]

성 둘레는 1,688m이고 높이는 2.5m에 달합니다. 수많은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곳으로, 기록에 의하면 후삼국시대 견훤이 이곳을 본거지로 9년을 보내며 후백제국의 기초를 다졌다고 합니다. 고고학적으로 는 각 시대별 성벽 축조 방법과 활용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으로 꼽힙니다.

[안성맞춤랜드]

안성을  대표하는  문화휴양공간으로  사계절썰매장, 안성맞춤천문과학관,  안성맞춤공예문화센터,  안성남사당공연장, 안성맞춤캠핑장 등을 갖추었습니다.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잔디공원과 수변공원 등도 잘 조성해 놓았습니다.

[칠장사]

신라 7세기 중엽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는 절집입니다. 11세기경 혜소국사가 7명의 도적을 계도해 성인이 됐다는 전설과 함께 임꺽정과 어사 박문수와 관련한 설화가 전해집니다. 국보 1점과 보물 4점, 여러 지방문화재를 보유했습니다.

[미리내성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성지입니다. 밤마다 종교 활동을 위해 켜놓은 불빛들이 달빛 아래 비치는 냇물과 어우러져 은하수를 뜻하는 ‘미리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안성팜랜드]

가축과 교감하는 국내 최초의 체험형 놀이목장으로,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놀이시설이 있어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의 방문이 많습니다. 4월이면 그림 같은 호밀밭 풍경이 펼쳐지고, 주위로 배꽃도 환하게 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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