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바로 알기] 40여 년 전 5.18 광주의 아픔 & 400여 년 전 남한산성의 슬픔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고 가야 할 길…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40여 년 전 5.18 광주의 아픔 & 400여 년 전 남한산성의 슬픔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고 가야 할 길…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40여 년 전, 전라남도 광주의 5월은 어느 태양보다 뜨거웠고, 어느 폭압보다 무서웠다. 반면,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감동의 공간이기도 했다. 약 400여 년 전, 한강 이남 광주에는 만주족의 폭정과 이에 맞서는 민중들의 투쟁이 공존했다.

위태로운 국가의 운명과 생존의 기로에 선 백성들의 삶까지 책임져야 했던, 그러나 그러지 못했던 임금의 슬픔도 있었고, 이는 또 한 줄의 역사가 됐다. 역사를 바로 알아가는 것, 그것은 바로 현대를 제대로 살아가는 또 하나의 방편이다.

글 이도희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큰 줄기···
전남 광주 5·18민주화운동

사진 제공: 5·18기념재단
(1980년 당시 전남매일신문 기자 나경택 촬영)

피로 물든 39년 전 그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이후,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군사정권의 집권이 반복되자 민주주의 세력들은 반발하며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1980년 5월 초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광주에서는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연일 시국 성토대회가 이어졌다.

1980년 5월 17일 오후 11시 40분, 신군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됨’을 발표한다. 이에 18일 새벽 광주 곳곳에 계엄군이 배치되고 언론사와 시내 주요 기관이 통제됐으며 학생들이 연행됐다. ‘광주를 무차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온 계엄군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력을 행사했다. 18일부터 21일까지 시민들은 걸어가다가, 바둑을 두다가, 밥을 먹다가 갑자기 총에 맞고 칼에 찔려야만 했다. 계엄군의 무차별 공격에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고 광주 시내 120여 개 병원과 보건소 등에는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사상자가 넘쳐났다.

21일 저녁, 계엄군이 잠시 퇴각한 틈에 시위대가 도청을 점령했다. 이때 시민들은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자발적으로 질서를 회복했다. 그러나 이후 광주 외곽을 원천 봉쇄한 계엄군이 다시 조여 오면서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됐다. 5월 27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은 시내로 들어와 시민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도청 안에 있던 시민들은 마지막 항전을 이어 나갔지만, 무장한 계엄군이 광주 전역을 장악하면서 작전명 ‘화려한 휴가’도 끝나고, 계엄군의 공격도 그쳤다.

오늘날, 우리가 가야 할 길

거리는 피로 물들었고 총소리와 통곡만이 가득했던 5·18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 길이 남을 투쟁으로 기억된다. 추모제를 비롯해 학술심포지엄과 국제연대사업 등으로 항쟁을 되새기고, 이를 주제로 한 많은 예술작품도 만들어졌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기록문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원회가 구성돼 민주화운동 당시의 기록과 증언, 사진, 선언문 등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역사를 바로 알고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 중이다.

올해는 5·18민주화운동이 있은 지 39주년을 맞은 해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밝혀야 할 진실이 많다. 국립5·18민주묘지에 묻힌 많은 사상자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바른 민주주의를 정립해 나가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굴욕의 역사···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병자호란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남한산성 성곽을 둘러보는
경기도의회 간행물편찬위원회 위원들.

병자년의 난

1627년 후금(만주족)이 조선을 쳐들어왔다. 당시 아무런 준비가 안 돼 있던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당하게 되고 후금에 ‘형제의 맹약’을 맺는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이후 만주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까지 세력을 확장한 후금은 기세를 몰아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의’로 바꾸는 것 외에 무리한 돈과 물자까지 요구하며 다시 한 번 조선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이때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친다.

1636년 12월 1일, 청은 1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입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병자호란이다. 예상보다 빠른 청의 공격에 조선은 또다시 위기에 처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한다. 이때 성 안에 있던 군사는 1만 3,000명이었고 식량은 50여 일을 겨우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청의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성 안의 조선군과 성 밖의 청군은 계속해서 공방을 벌였고, 이는 해를 넘겨 1637년 1월까지 이어졌다.

1637년 1월 30일, 조선은 청에 완전히 굴복하고 군신의 관계를 약속하는 11조 문에 합의한다. 인조는 한양과 남한산성을 잇던 한강 상류의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웠다. 이로써 조선은 청의 속국이 된다. 굴욕적인 항복과 동시에 많은 신하와 왕자들이 볼모로 붙잡혀 갔고 청에 의해 조선의 왕이 책봉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됐다.

우리가 남한산성을 기억하는 방법

신라시대에 지어졌다고 추정되는 남한산성은 동아시아에서 도시계획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증거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매년 10월 열리는 남한산성 문화제는 성곽 투어, 세계 체험 등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해 ‘2019 경기관광 대표축제’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무료 셔틀버스 운행도 고려 중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에 맞서 47일 동안 항전했던 행궁은 1907년 일제에 의해 파괴된 후 10여 년의 작업 끝에 2011년 복원이 완료됐다. 400여 년 동안 수차례 훼손과 복원을 반복한 남한산성은 이제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다. 아픔의 역사일지라도 계속해서 보존하고 기억하려 노력해야 한다. 더 이상 아프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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