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인연은 아주 깊습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꿈을 풀이해 왕이 될 것을 예언했고, 조선 개국 후 수도와 궁궐터를 잡는 데 일조했습니다. 그런 무학대사가 거처하던 곳이 양주의 회암사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컸던 회암사에서 태조는 무학과 생활하며, ‘왕자의 난’으로 쓸쓸하고 헛헛해진 마음을 달랬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회암사는 사찰에 궁궐의 역할까지 겸하는 특수한 형태의 왕실사찰이 됐습니다.
경기북부 역사의 중심
고구려 때는 매성군(또는 창화군)이라고 불렸습니다. 신라 경덕왕 때는 내소, 고려 초에는 견주라고 불렸고, 고려 때 지방 12목 중 하나인 양주목이 됐습니다. 고려 후기까지만 해도 남양주·구리·의정부·동두천 등을 포괄하는 경기북부의 ‘큰집’이었으나, 조선 태조 4년(1395)에 양주의 상당 부분이 도읍인 한양에 편입됐고, 이후 근·현대를 거치며 모두 분리됐습니다.
삼국이 패권을 다투던 요충지
경기도 북부와 서울을 연결하는 길목에 있어 고대부터 국토의 요충지였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이곳에서 한반도 패권을 두고 전쟁을 일삼았고, 매초성전투에서 신라가 당나라에 승리해 삼국통일을 완수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부원수 신각과 유도대장 이양원이 해유령에서 왜군과 맞서 싸워 이겼습니다. 해유령은 임진왜란 최초의 육지전투 승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600년 문화유산의 고장
양주는 ‘삶과 농경’과 관련된 전승놀이가 많은 곳입니다. ‘양주소놀이굿’ ‘양주들노래’ ‘양주농악’ ‘양주별산대놀이’ ‘양주상여와 회다지소리’ 등으로, 모두 그 전통성과 원형성을 인정받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이중 양주별산대놀이는 600년 동안 이어진 탈놀이로, 1964년 12월 7일 국가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됐습니다. 봉산탈춤과 함께 ‘한국 가면극’의 쌍두마차로 불립니다.
전통과 현대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양주법
[회암사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200여 년 동안 번창했던 회암사 터로,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28호로 지정됐습니다. 입구 박물관에서는 왕실 문양을 사용하고 왕실 조경을 재현했던 회암사의 찬란했던 한때를 만날 수 있고, 절터 북쪽 능선에서는 지공·나옹의 승탑과 함께 보물 제388호인 회암사지부도를 볼 수 있습니다.
[양주관아지]
양주관아는 1506년에 설치돼 500여 년 간 양주목을 관할한 행정관청입니다. 동헌, 객사 등 수십 개 시설이 있었으나 6·25전쟁 때 모두 소실돼, 최근 옛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했습니다.
[필룩스조명박물관]
조명의 역사와 조명의 역할, 세계 조명 시장의 흐름 등 조명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곳입니다.
[장욱진미술관]
화가 장욱진의 동화처럼 아름답고 순수한 그림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조각공원도 함께 있습니다.
[장흥관광지]
장흥면 석현리에 있는 국민관광지로, 가나아트파크를 비롯해 장흥자생수목원, 송암천문대, 권율장군 묘, 두리랜드(리모델링으로 휴장), 청암민속박물관 등 가족과 찾기 좋은 문화유적과 문화공간이 즐비한 곳입니다.
[육지장사 템플스테이]
백석읍 도리산 깊은 곳에 있는 육지장사에서는 건강을 테마로 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와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명상과 휴식으로 돌보기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