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옛이야기(광명시 편)

광명 도덕산에 얽힌신비로운 인연 이야기 外

광명시에는 도덕산에 얽힌 인연과 신령스러운 회화나무,오리 이원익의 고택 이야기 등 다양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정리 정명곤 사진 국가문화유산포털

 

 

부부 인연의 소중함 일깨워주는

광명 도덕산의 전설

먼 옛날 지금의 도덕산 기슭에 질그릇을만들어 파는 가난한 도공이 있었다. 도공에게는 16명이나 되는 자녀가 있어 살림이 무척 어려웠다. 어느 날 점쟁이가 다가와 “자네는 팔자가 좋아 또 장가를 들겠는데, 이번에는 부자가 된다”라고 점괘를 말했다. 동네에 사는 대감댁 딸이병이 들어 죽었다. 대감은 굿을 하기 위해 무당을 불렀는데, 무당은 “처녀 귀신이 된 딸을 결혼시켜 한을 풀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대감의 지시를 받은 일꾼은마침 질그릇을 팔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공을 보쌈해 대감의 집에 데리고 왔다.

 

광명 도덕산

 

도공은 할 수 없이 처녀의 시신과 함께신방에 들어 밤을 새웠다. 대감은 도공에게 많은 재물을 주며 집으로 돌려보내고나서야 딸의 장례를 지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공은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도덕산기슭에 있는 어느 무덤 앞에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의 앞에는 죽은 처녀의혼백이 서 있었다. 처녀는 “저는 비록 죽은 몸이지만 서방님과 부부가 되었으니한을 풀었습니다. 제 무덤에 제사를 지내주신다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꿈에서 깬 도공은자기 앞의 무덤이 그 처녀의 무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후 처녀를 위해제사를 지내는 등 부부로서 해야 할 바를해주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처녀가 묻힌산을 부부 인연의 소중함을 가르쳤다고해 도덕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관련 명소 도덕산

 

 

 

“저는 비록 죽은 몸이지만 서방님과 부부가 되었으니 한을 풀었습니다.”

 

신령한 만병통치의 우물

도련님 우물

광명시 원광명에는 마시면 어떤 병도 낫는다는 우물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우물은 물을 떠다 놓고 고사를 지내면 앓는 이가 건강해져 돌아온다는 신통력이있었다. 현재 ‘덕안이 길’로 되어 있는 광문중학교에서 도덕산 가는 길을 마을 사람들은 ‘도련님 우물길’이라고 부른다.

관련 명소 도련님 우물길

 

 

 

광명시 마을 이름의 유래

독 안처럼 생긴 ‘가학동 도고내’

‘도고내’의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한다. 하나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마을의 모양이독 안처럼 생겼다고 해 도고내라는 설과 고개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인 도고내에서 왔다는 설이 그것이다. 도고내는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지도와 함께 기록돼 있다.

 

너른 들판이었던 ‘광명동 너부대’

예전에 넓은 들판이었다고 해 ‘너부대’라고 불렀다. 보름이면 들판에 쥐불을 놓아 넓게타는 불꽃이 장관을 이뤘다고 해 ‘광화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배부른 사람 누운 모습의 ‘옥길동 식골’

광명동에서 이 마을을 바라보면 배부른 사람이 누워 있는 모습으로 보이고, 만수산의산봉이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 ‘식골(곡)’이라고도 불렀다.

 

전란도 피한 편안한 마을 ‘하안동 안터’

구름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쪽으로 트인 마을로 밤일과 안현 사이에 있다. 전란이 일어나도 마을이 안쪽에 있어 피해가 없었고, 도둑이 없고 인심이 좋아 살기 편한 마을이라고 해 ‘안터’라고 불렀다. 또 삼태기처럼 오목한 곳에 위치해 안터라고 부르기도 했다.

 

 

원광명 회화나무

 

정원용 묘비

 

“40년 동안 정승을 지낸 자가 단지 몇 칸 초가집이라니”

 

신령스러운

회나무대감 설화

경기도 광명시 광명7동 지역에서 수령300년이 넘는 회화나무와 관련해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다. 박삼분은 광명시 원광명으로 시집와 61년을 사는 동안 회화나무를 ‘회나무대감님’이라 부르며 농사때나 추수 때나,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길때나 궂은일이 생길 때나 정안수를 떠 놓고 빌었다. 어느 날 벼락이 쳐 나뭇가지가 떨어지는 바람에 장이 깨지는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이 있은 후 시어머니가 병이 났다. 돼지머리, 삼색 시루떡, 떡살을담아 밤마다 부뚜막에서 빌자 시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언젠가는 토담을 없애고 회화나무 뿌리를 자른 뒤 담장을 세우자 할아버지가 쓰러지셨다.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고 소금을 끓여 붓자할아버지께서 파랗게 질려 또 쓰러지셨다. 놀라서 오류동 만신을 불러 굿을 하고, 머슴 박 씨가 정안수를 동이로 떠다가져다 놓았다. 40년 전의 일이다. 만신이 도투마리 경을 읽고 굿을 하고 난 다음에야 할아버지가 일어나셨다. 머슴 박씨가 자기가 나무를 잘라 그렇다며 절을하고 치성을 드렸다. 머슴 박 씨가 잘못을 뉘우치자 회화나무는 잘 자라게 되었다. 그 후에는 용마루로 나뭇가지가 부러져 떨어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집을 고치고 살았다.

관련 명물 원광명 회화나무

 

경산 정원용 의대

 

딱한 이에게 적선하고

정승이 된 정원용

광명시의 역사적 인물 중에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라는 검소하고 청렴한관리가 있었다. 그가 아직 관직에 나가기위해 공부하던 젊은 시절의 일이다. 한번은 전라감사로 있는 외삼촌을 만나러 갔다가 귀가하려고 했다. 외삼촌은 정원용이 공부에만 전력을 기울이도록 막대한돈을 쥐여 보냈다. 돌아오는 도중 어떤마을에 괴질이 돌아 부인의 곡성이 들려왔다. 사정을 살펴보니, 마을에 살던 김진사라는 사람과 일곱 식구가 모두 괴질에 걸려 부인만 남고 모두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체는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니 “보통 병에 죽은 것도 아니고괴질로 죽었으니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옳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거기다가 돈은커녕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 막막할 뿐입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이때 정원용은 자기가 가지고있던 돈을 모두 내놓아 장례를 치르게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외삼촌이 아무것도 주지 않더냐?”라고 물었다. 정원용은 어머니께 도중에 있었던일을 고백하고 사죄를 했다. 뜻밖에도 어머니는 “이는 죄가 아니다. 남에게 커다란 적선을 하고 은혜를 베풀지 않았느냐.너는 장래 큰 인물이 될 것이다” 하며 칭찬해 주었다고 한다. 광명시 학온동에 묘소를 둔 경산 정원용은 72년간 관직 생활을 하며 영의정을 여섯 차례나 지낸 인물이다. 글씨와 경술, 문장에 능해 <경산집>,<경산일록>,<백과사전>등 다수를저술했다. 그는 늘 검소하게 생활하며 청렴결백했다.

관련 명소 정원용 묘

 

청백리에 내린 임금의 선물

충현서원 터 고택 관감당

관감정은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 퇴관하고 은거하던 곳이다. 인조가 승지를 보내어 이원익의 거처를 묻자 대답하기를 “초가집이 고요하고 쓸쓸해 비바람을 가릴 수 없었다”라고 했다. 인조가말하기를 “40년 동안 정승을 지낸 자가단지 몇 칸 초가집이라니, 만약 모든 벼슬아치가 이와 같다면 어찌 백성의 빈곤을 근심하겠는가! 본도에 명령해 정당(正堂)을 지어주도록 하여라”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소박한 침구를 하사하고검소한 덕을 바로잡게 했다. 인조는 “경을 위해 집 한 채를 지어주니, 대개 신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감동하는 곳으로 삼으려 함이니라”라고 하니 완평부원군 이원익도 할 수 없이 들어가 기거했다. 병자호란 때 집이 훼손되어 자손들이 중건하고, 그의 사후 남은 상(像)을받들어 현판을 관감당이라 했다.

관련 명소 오리 이원익 종택 및 관감당

 

관감당

 

 

어르신을 위한 큰 글씨

광명시의 전설과 설화

광명 도덕산의 전설

가난한 도공이 처녀 귀신과 혼례를 치르고 부부의예를 정성껏 다한 이야기가 도덕산에 전해 내려온다.

신령한 만병통치 우물

광문중학교에서 도덕산 가는 길을 ‘도련님 우물길’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병도 낫는다는 우물이이곳에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신령스러운 회나무대감 설화

광명7동에 수령 300년 넘은 회화나무가 있는데그와 얽힌 신비한 일이 예부터 많이 전해진다.

청백리에 내린 임금의 선물

40년 넘는 동안 정승을 지낸 오리 이원익이퇴관하고도 초가집에 머물자 인조가 집 한 채를하사했는데 이곳이 바로 오리 이원익 종택과관감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