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3 · 1운동 발단의 중심
-양평 몽양여운형기념관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줄기가 만나 빼어난 수변 경관을 자랑하는 양평 ‘두 물’머리를 지나 한강기맥 용문산(龍門山) 능선으로 이어지는 청계산 자락 아래, 3·1운동을 처음 기획하고 추진한 청년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자 ‘해방 공간의 진짜 애국자’로도 불리는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선생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경기지역 후기 의병들의 초기 활동 중심지로 기록되는 양평이 고향인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립을 도운 신한청년당의 당수로 활약한 인물입니다. 1914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1918년 8월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결성하고, 그해 11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독립이라는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기 바로 1년 전엔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해 해방 후의 건국을 준비했으며, 해방 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조선을 대표해 치안권을 넘겨받고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한 남북합작 운동에 전력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자주독립을 내세운 그의 주장은 외세의 압력이 이어지면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라는 지배적 인상을 대중에게 심어 주게 됐으며, 12번이라는 암살 테러 앞에 결국 1947년 62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됩니다.
우리 정부는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0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했으며, 양주군민들은 그의 삶과 정신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2011년 몽양여운형기념관을 개관했습니다.
양서면 신원리 묘골(妙谷)마을에 위치한 기념관으로 향하는 길, ‘나의 사랑하는 집’이란 뜻을 가진 ‘애오와공원’과 길섶에서는 그의 생전 어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길 끝에 아담하게 자리한 기념관 내부로 들어서면,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진보적 학문을 깨우치고 영어 회화에 능통하는 등 계몽사상가이자 대중정치가로서의 활약과 흉탄에 의해 서거할 때까지의 일대기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해야 한다.”
– 1945년 해방 후 휘문학교 운동장에서 행한 첫 연설 중에서
기념관 한가운데에서 의자에 앉아 책을 펴고 뭔가를 말해 주는 듯한 여운형 선생. 잠시 그에게로 다가가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한편 경기지역에서 개성·시흥에 이어 세 번째로 기록되는 양평에서의 3·1만세운동은 10일 서종면에서 20대 청년들의 주도로 처음 발발해 24일 갈산장터(현재의 양평읍)에서 1,000여 명의 사람들 손에 든 태극기와 함께 시작됐고, 점차 강상면과 용문면 · 강하면 · 양서면 · 고읍면 · 양동면 · 지제면 · 개군면으로 이어지며 2만 1,000명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