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 독립운동가
이종훈(李鍾勳)
동학과 천도교 지도자로서 기미년 3월 1일 그날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최고령자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어려서부터 성정이 강직해 한번 굳게 정한 뜻은 굽히는 법이 없었다던 선생의 구국 활동을 살펴본다.
글 이미진•참조 국가보훈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학 입도 후 민족 독립운동 지도자로 성장
이종훈 선생은 1856년 3월 경기도 광주 관촌면 유사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10~14세 때까지는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21세 때에는 대장간을 운영한 것으로 확인된다.
선생의 인생에서 전화기를 맞은 것은 나이 25세가 돼서다. 선생은 동학에 입도해 1894년 동학농민전쟁 2차 봉기 과정에서 경기·충청·강원을 포함한 20여 개가 넘는 포(包)를 지휘하는 지도자로 성장하게 된다.
이후 선생은 천도교가 창건되는 과정에 적극 참여해 중앙교단의 고위 간부직도 맡게 된다. 1898년 6월 천도교 2대 교조 최시형이 서울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자 광화문 공동묘지에서 시신을 수습해 여주군 금사면으로 이장하기도 했다.
구국을 위해 오직 한길을 걷다
1902년에는 손병희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해 권동진·오세창 등을 만나 쇠약해 가는 구국의 방도를 논의했다.
1912년에는 천도교단에서 민족문화수 호운동본부를 조직하고 제3분과 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1914 년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천도교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이 패할 경우 조선이 독립할 기회를 맞을 것’이라는 전망이 떠돌기 시작했고, 급 기야 독립운동을 계획하게 된다.
천도교 중앙교단의 장로였던 선생은 1919년 2월 25일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에 최종적으로 찬동해 민족대표로서 날인하기로 약속했다. 2월 28일 밤에 손병희의 집에서 3·1 독립운동에 대 한 최종회의에 참석했으며,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마침내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게 된다. 이때 선생은 출동한 일본 경찰에 검거돼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
출옥 후에도 선생의 독립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당시 61세의 고령임에도 천도교 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단체 고려혁명위원회의 고문으로 추대돼 항일운동을 계속 이어나가 1931년 5월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구국 활동을 펼쳤다.
정부는 이런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