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최익현 선생

고희(古稀)가 넘은 나이에 의병을 일으키다 – 독립운동가 최익현 선생

경기도 포천군 가범리에서 태어난 최익현 선생은 74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다. 성품이 대쪽 같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으로 이름나 있던 선생은 일제강점기 불굴의 민족정신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해 타의 귀감이 됐다. 마지막 순간까지 완전한 자주독립을 꿈꾸었던 경기도의 독립운동가 최익현 선생을 만나 본다.

글 이경희•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자주적 민족 사상을 정립하다

어릴 때부터 눈에 띄는 영특함과 재주로 기남(奇男)이라고 불린 최익현 선생은 14세 때 삶의 지표로 삼을 만한 인물을 만난다.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성리학의 거목인 이항로의 문인이 됐고, 우국애민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받아 이를 자주적인 민족 사상으로 체계화해 정립했다.그가 관직에 들어선 것은 1855년(철종 6년) 정시문과에 급제하면서부터다. 이후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는데 특유의 강단과 강직한 성품으로 부정부패를 척결해 이름을 날렸다.

그러다 1868년(고종 5년)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의 이유를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함으로써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로 다시 기용됐지만, 흥선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지속적으로 언급하다가 결국 ‘왕의 아버지인 군부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를 당했다가 풀려났다

 

최익현 선생(崔益鉉, 1833.12.5.~1906.11.17.)
최익현 선생(崔益鉉, 1833.12.5.~1906.11.17.)

 

최후의 순간까지 일제에 항거하다

최익현 선생은 일제가 노골적인 침략 의지를 드러내던 순간부터 한결같은 의지와 전의로 항명하고 불복해 온 강직한 인물이었다. 1876년에는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했고,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격렬하게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관직에 임명됐으나 모두 거절하고 향리에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다.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며 울분을 토로하고, 백성들에게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본 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마침내 74세의 고령에 집을 떠나 임병찬, 임락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최익현 선생은 당시 남원을 지키고 있던 우리 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동족끼리 총칼을 겨누어야 하는 현실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의병대를 해산시켰다. 그는 이후 서울로 압송돼 일제의 재판을 받고 대마도에서 감금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조차 적에게서 음식을 받지 않겠다며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결국 1907년 1월 1일(음력 1906년 11월 17일) 숨을 거두고 만다. 1907년 1월 6일 부산으로 돌아온 그의 시신은 시민과 유림들의 눈물 속에서 꿈에 그리던 조국에 묻혔으며,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함으로써 그의 불멸의 독립정신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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