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시에 전해 내려오는
옛날 이야기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의왕시는 북쪽으로는 청계산, 동쪽으로는 백운산, 남쪽으로는 덕성산을 접하고 있으며, 시 안쪽으로 모락산과 오봉산을 품고 있다.
시 전체 면적의 대부분이 개발제한구역일 정도로 산이 많아 자연환경이 매우 뛰어나며, 예로부터 산과 얽힌 다양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의왕시의 전설을 소개한다.
글. 이선영 사진. 정송화 출처. 의왕시청
청계산에 은둔했던
고려 유신 이야기
청계산의 산정에 석대 하나가 있는데 이것이 망경대다. 망경대에는 고려왕조의 최후를 몸소 겪고 망명의 길을 떠났던 충신 조윤(1374~1429)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조윤은 고려를 빛낸 선비이자 중신으로 두문동(杜門洞) 72인 중 한 명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고려의 신하들을 찾아 궁에 초청했으나 하나같이 그의 명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조윤 역시 이성계의 부름을 받고 궁에 들기는 했으나 내려 받은 호조판서 벼슬을 거부했다.
조선의 개국을 받아들이지 않은 조윤은 경기도 광주의 깊은 산을 찾아 헤매며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개 울음소리를 피해 어느 높은 봉에 이르렀다. 이곳이 바로 청계산이다. 아무리 좋은 경치라도 나라와 임금을 잃고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는 조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지는 못했다. 조윤은 고려의 수도인 송경을 향해 울다 쓰러져 잠들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사람들은 조윤의 슬픔을 담아 망경대라고 불렀다.
조윤이 청계산에 들었다는 소문을 들은 이성계는 그의 충절에 깊이 감동하고 친히 청계산을 찾아 그를 설득했으나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성계는 산정에 초막을 만들어 조윤이 비를 피할 수 있게 했으나, 조윤은 청계산을 떠나 양주 깊은 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초막이 있던 자리가 오늘의 망경대이다.
관련 지역 : 망경대, 청계사
옛 부잣집이 망한 이유
월암 안터 옛이야기
의왕시 월암동에는 안터마을이 있다. 지금은 옛이야기를 지닌 널따란 밭이 있을 뿐 인가는 없으나 예전엔 상당한 부자가 살았다. 부잣집에는 날마다 손님이 찾아들었다. 부자는 식객들을 거절할 수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금강산에서 내려온 한 승려가 대문 밖에서 목탁을 두르리며 시주를 청했다. 북적이는 손님들에 마음이 늘 불편하던 주인 영감은 승려에게 한마디를 했다.
“여보시오, 스님. 보시다시피 우리 집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냥 가시지요.”
그러자 승려는 눈을 감은 채로 답했다.
“나리 인덕에 손님이 많이 오시는 것도 부처님의 은덕이 아니옵니까? 그러니 다소간 시주를 베푸시는 것이 또한 소승에 대한 보시가 아니겠습니까?”
영감은 “좋소. 내 이번엔 시주를 아주 많이 하겠으니 부처님께 내 소원을 올려주실 수 있겠소? 찾아오는 손님이 그치지 않아 골치가 아프니 제발 손님들이 우리 집을 찾지 않도록 불공을 좀 드려달라는 소원이요”라고 말했다.
승려는 “예, 나리의 소원이 그것이라면 해드리지요.”
영감은 곧 하인을 시켜 광에서 쌀 한 말을 가져다 승려에게 건넸다.
“스님, 우리 집에서는 앞으로 다시 시주가 없을 것인즉, 그리 아시오.”
“예, 알겠습니다. 소승은 이제 다시는 댁에 들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다시 댁에 모이지 않게 하는 좋은 수가 있습니다.”
주인은 반가워하며 그 수를 물었다. “댁에 들어오는 작은 길을 배로 넓히고 굽은 길목을 곧게 바로잡으십시오.”
승려가 돌아간 뒤 영감은 승려가 이른 대로 길을 넓히고 굽은 길목을 바로잡느라 큰 법석을 떨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 부잣집에는 길을 고치기 전보다도 더 많은 손님이 몰려들었다. 집주인이 손님들이 출입하기 편하도록 길을 넓히고 길을 고쳤다는 소문이 난 것이다.
모여드는 군중에 집은 마치 저잣거리와 같았다. 부잣집은 너무 많은 손님에 살림이 점차 줄기 시작하더니 얼마 못 가 망해버렸다. 이후 집도 낡아 허물어지고 이웃집도 하나둘 다른 곳으로 옮겨 결국은 지금처럼 넓은 밭만이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관련 지역 : 월암동 안터마을
여섯 정승을 낸 묫자리
오봉산의 전설
옛날 중국의 유명한 지관이 역적의 죄명을 쓰고 조선 땅으로 피신했다가 청풍 김씨의 은혜를 입게 됐다. 마침 청풍 김씨 문중의 한 할머니가 갑자기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중국 지관은 은혜를 갚고자 산소를 봐주었다. 자리는 바로 오봉산의 한 기와집이었다.
청풍 김씨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큰마음을 먹고 집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으나 집주인은 크게 노여워했다. 그런데 그날 밤 영문 모를 불이 나 그 집이 몽땅 타버렸고, 같은 날 노부인도 운명을 달리했다. 양가는 원만한 합의를 얻어 청풍 김씨는 그 집터에 묘를 쓰게 되었다.
지관은 “광중을 만들 때 얼마큼 파 내려가면 펑퍼짐한 돌이 부딪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 파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장례 날, 광중을 파 내려가는데 중국 지관이 말한 그대로였다. 그러나 광중으로서는 너무 얕아 보였다. 급히 가족회의를 열고 막내아우가 홀로 광중을 지켰다. 막내아우는 광중의 돌이 궁금해 들어 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깜짝 놀라 다시 돌을 놓아버렸다. 무엇인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듯했다. 돌 밑에는 돌로 된 옥동자 다섯 개가 앉아 있었고, 조금 더 큰 옥동자
하나는 서 있었다.
가족회의가 끝나고 중국 지관의 말을 따라 돌 위에 하관을 하고 묘를 만들었다. 산소가 완성되었으나 막내아우는 홀로 본 광경이 너무나 무서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중국으로 돌아간 지관은 아버지로부터 은인께 풍수를 잘못 일러주었다며 큰 꾸중을 들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는 다섯 정승을 거느리고 역적모의를 하는 또 하나의 옥동자가 있었던 자리로 즉시 산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 제의했다.
지관은 다시 청풍 김씨 댁을 찾아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고, 청풍 김씨의 막내 아우는 장례식 날 광중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중국 지관은 그제야 한숨을 푹 쉬며 “그럼 괜찮습니다. 역적은 사라지고 대신 여섯 정승이 나올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 후 청풍 김씨 집안에는 여섯 정승이 나왔다. 의왕시 왕곡동에서 시청 쪽으로 가다 보면 경수산업도로 건너편으로 다섯 봉우리가 나란히 바라다보이고 그 끝에 봉우리 하나가 더 있어 여섯 봉우리
의 모습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