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 여러 모습으로 사랑받아 온 토끼
계묘년을 맞이하는 경기도민과 한민족에게 토끼는 어떤 의미였을까.
우리 곁에서 여러 모습으로 사랑받아 온 토끼에 대해 샅샅이 알아보자. 글. 남혜경
언제부터 토끼를 토끼라 불렀을까
현대국어 ‘토끼’는 ‘톳기’라는 옛말로 15세기 문헌에 최초 등장한다.
19세기에는 두 번째 음절 초성의 된소리를 ‘ㅺ’으로 표기한 ‘토’ 형 태가 등장했는데,
이는 표기법만 다를 뿐 현 대 한국어의 ‘토끼’와 소리는 동일하다.
선사시대에도 토끼가 있었다
토끼라고 불리기 전부터 토끼는 한반도 땅 에서 살아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회화 작품인 울산의 울주대곡리반구대암각화에도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린 토끼가 등장한다.
그 런가 하면 토끼라는 글자로 문헌에 처음 등 장하는 것은 고구려 6대 태조왕 25년(기원 후 77년) 때의 일이다.
부여국 사신이 바친 상서로운 짐승 중 꼬리 긴 토끼가 있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한편, 이러한 옛 기록 속 토끼는 한반도의 산천을 뛰어놀던 산토끼들이다.
현재의 사 육용 집토끼는 1900년대 일본에서 들여온 것으로, 중일전쟁 기간에는 군용 모피 생산 을 위해, 1960년대 경제발전 시기에는 수출 용 앙고라 생산을 위해, 1970년대에는 육류 생산을 위해 대규모로 사육됐다.
지혜롭고 신묘하게 묘사되는 토끼
보름달이 뜰 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게 만 드는 달토끼 이야기가 있다.
달토끼는 고대 인도 설화에서 비롯해 중국을 거쳐 전해진 이야기로, 본래 이야기에는 달나라 계수나 무 밑에서 떡 대신 불로장생의 약방아를 찧 는 토끼가 등장한다.
낙랑고분 출토물이나 고구려 고분벽화, 통일신라 수막새나 고려 불화 등 우리 역사 속 다양한 문화재에서 이 같은 도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면서 한국인은 이를 떡을 찧는 토끼 이야기 로 발전시켰다.
가득 차오른 보름달 속에서 토끼가 쿵더쿵 떡방아를 찧는 모습은 그대로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야기 속 토끼는 힘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 혜로 위기를 극복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자 라를 따라 용궁에 다녀온 토끼 이야기가 대 표적이다.
토끼전·토생원전·별주부전·수궁 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변주된 이 이야기는 비슷한 내용이 <삼국사기>에 등장할 정도 로 그 기원도 오래다.
경기도의 토끼 관련 민담으로는 경기도 부천시 지역에 전해 내 려오는 ‘토끼와 바보 호랑이’가 있다.
떡을 준다 속이고는 뜨겁게 달군 차돌을 주고, 타 닥타닥 대나무 타는 소리를 참새 떼 날아오 는 소리라 거짓말해 타 죽을 뻔하게 만드는 가 하면, 꼬리를 얼음물에 담그면 낚시를 할 수 있다고 속여 토끼가 호랑이를 혼내주고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내용이다.
토끼가 등장하는 속담
토끼가 등장하는 속담도 많다.
먼저, 욕심을 부려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한 가지도 제대 로 이루지 못하는 경우를 표현하는 말로는 ‘가는 토끼 잡으려다가 잡은 토끼 놓친다’, ‘달아나는 노루 보고 얻은 토끼 잃는다’, ‘산 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 ‘두 마리 토 끼 잡으려다 둘 다 놓친다’ 등이 있다.
반대로, ‘두 마리 토끼를 잡다’는 한 가지 행동으로 두 가지 일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토끼 죽으니 여우가 슬퍼한다’라는 같은 부류의 슬픔이나 괴로움 따위를 동정하는 것을, ‘호랑이 없는 고을에 토끼가 왕 노릇한다’는 보잘것없는 이가 권력자가 없는 틈을 타 큰소리치는 모습을, ‘토끼가 제 방귀에 놀란다’는 남몰래 저지른 일이 걱정돼 작은 일 에도 놀라는 상황을 말하거나 행동과 말이 가볍고 방정맞음을 비유한다.
‘노루 잡는 사 람이 토끼가 보이나’는 하찮고 사소한 것에 얽매이다 큰일을 잃는 것을, ‘바다에 가서 토 끼 찾기’는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애쓰는 마 음이나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는 상황을 이른다.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필요가 없어지면 도와준 이를 버리는 것을 표현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사자성어를 풀이한 것이다.
풍요와 수호의 상징인 토끼 토끼는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다. 태어난 지 8개월부터 1년 내내 임신이 가능하고, 단 1 개월 임신으로 평균 6마리를 낳을 정도로 번식력이 무척 강하기 때문이다.
창덕궁 왕 비의 침소인 대조전 굴뚝, 토우로 장식한 5~6세기 신라의 항아리 장경호 등 아마도 생산과 번창을 기원했을 유물에서 토끼를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우리 문화 속 토끼는 세상의 질서를 지키는 수호자 역할도 한다.
먼저 토끼는 동쪽을 상징하는 방위신 역할을 한다.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 봉미산에 자리한 신륵사 다층전탑 기단 동쪽에 토끼 卯(묘)가 새겨진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토끼는 풍요를 일구는 시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토끼 귀처럼 새싹이 올라와 농사를 시작하는 음력 2월, 농부들이 들판으로 일하러 가 는 오전 5~7시가 모두 토끼의 이름을 빌려 쓴다. 토끼는 12지신 중 정묘신장이라 불리며 민 간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정묘신장은 토끼 머리에 사람 몸을 하고 있는 신인데, 구천의 번갯불을 다스리는 사령으로서 붉 고 푸른 주석 방울을 들고 여섯 귀신과 6만 6,660명의 병사를 부려 사귀를 내쫓아 죽 이고 진실한 사람을 보좌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토끼 꿈은 무슨 의미일까
이처럼 우리 문화 속 토끼는 여러모로 길한 동물이기 때문에 토끼가 들어오는 꿈은 길 몽으로 풀이한다.
특히 토끼의 강한 번식력 때문에 토끼를 기르는 꿈은 사업운과 금전 운을 상징하며, 반대로 기르던 토끼가 도망 가 버리는 꿈은 실직이나 손실을 상징한다.
경기도 곳곳의 지명에서 찾아볼 수 있는 토끼
친숙한 만큼 우리 땅 곳곳에는 토끼나 토 (兎), 묘(卯) 자가 들어간 지명도 많다.
국토 지리정보원에 따르면 전국 154만여 개 지명 중 이런 이름은 총 158개로, 경기도에서는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묘봉리(卯峯里), 지금 은 이천시 단천2리를 이르는 토끼실, 남양 주의 토끼섬 등이 그 예다.
그 외 경기도 용 인시 기흥구 보정동, 경기도 인창동 구리한 강시민공원,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등에서 토끼굴이라 이름 붙인 굴다리가 다수 존재한다.
반려동물로 토끼 기르기
토끼는 귀여운 용모와 순한 성질 덕분에 반 려동물로도 사랑받는다.
그러나 개와 고양 이에 비해 키우는 사람이 적다 보니 잘못 알려진 사육 정보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대표 적인 사례는 바로 토끼를 잡을 때 귀를 움켜쥐는 행동이다.
만화 등에서 자주 보는 모습 이지만, 귀로 몸무게를 지탱해야 하는 토끼 로서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올바른 방법은 배와 엉덩이를 받쳐 드는 것인데, 발버둥 칠 때 억지로 들어 올렸다가는 뼈가 연약한 토끼가 크게 다칠 수 있으니 주의해야한다.
‘토끼는 물을 먹으면 죽는다’는 속설 도 사실이 아니다. 여느 생물처럼 토끼에게 도 물은 생존하는 데 필수 요소이니 토끼를 기를 때도 물을 충분히 준다.
반면, 토끼를 물에 담가 씻기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토 끼의 털은 무척 빽빽하고 피부는 연약해 털 이 덜 마르면 피부병으로 진행하기 쉽기 때 문이다.
만약 토끼털에 무언가 묻었다면 목욕을 시키는 대신 물 묻힌 천으로 가볍게 닦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토끼의 주식은 당근이 아니라 건초라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알맞은 먹이를 먹지 않으면 토 끼의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주의한다. 마지막으로 가둬 기르던 토끼를 공원 등에 방생 하는 것은 금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집에 서 살던 집토끼는 야생에 적응할 수 없으므 로 생존하기 어렵다.
토끼의 생태학적 모습
토끼목 토낏과에 속하는 동물의 총칭이다.
두 귀가 길고 꼬리는 짧은 것이 특징이며, 종에 따라 크기는 1~1.5kg에서 7~8kg으로 상이하다.
야생형인 산토끼와 굴토끼류로 나뉘며, 그중 굴토끼를 개량해 다양한 집토끼 품종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산토끼는 주로 해발 500m 이하의 야산에 서식하며, 중국산 산토끼보다는 크고 일본산에 비해 서는 작다
토끼해에 태어난 위인
2023년 검은토끼해가 밝았다.
예로부터 토끼는 한민족에게 달의 정령이자 총명한 영물로 사랑받아 온 동물이다.
토끼의 그런 기운을 담뿍 받아 활약하는 한 해가 되길 바라며 토끼해에 태어난 역사 속 위인을 살펴보자. 글. 남혜경
김유신(595년 출생)
신라의 화랑 출신 장군으로 삼국통일의 공을 세웠다.
설총(655년 출생 추정)
통일신라시대 3대 문장가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라 전해진다.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현 하는 향찰(이두)의 권위자로 한문을 국어화하는 데 기여했다.
김부식(1075년 출생)
고려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 삼국시대 역사서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한호(1543년 출생)
조선 중기의 서예가. 호(號)인 석봉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두운 방에서 어머니는 떡을 썰고, 한석봉은 글씨를 썼다는 일화 가 유명하다.
장승업(1843년 출생)
수묵화법을 기본으로 근대적 화풍을 선보 인 조선 말기에 천재 화가.
안견,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화가로 불린다.
허위(1854년 출생)]
13도 의병 연합부대 군사장을 역임하는 등 조선 말기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유학자.
형제도 모두 무장 항일투쟁에 헌신했다.
지석영(1855년 출생)
종두법을 들여와 천연두 예방에 힘쓴 의 사이자, 국문연구소 위원 등으로 활약한 국어학자다.
이석영(1855년 출생)
이회영(1867년 출생)
항일 독립군의 산실이자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형제.
여섯 형제가 모두 전 재산을 팔아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안중근(1879년 출생)
만주 하얼빈에서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순국한 독립운동가.
한용운(1879년 출생)
승려이자 저항시인,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 시집 <님의 침묵>이 있다.
김대지(1891년 출생)
의열단을 이끌며 무장 항쟁의 주도적 역 할을 한 독립운동가.
초대 임시정부 의정 원 의원을 지냈다.
정지용(1902년 출생)
1920~1940년대에 활동한 시인. 모더니즘, 이미지즘 등이 작품의 특징이다.
대표 시로 ‘유리창’, ‘호수’, ‘향수’ 등이 있다.
황순원(1915년 출생)
단편소설 <소나기>로 유명한 소설가.
이 외 대표작으로 <독 짓는 늙은이>, <카인 의 후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