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외교의 선봉장이 되다 – 독립운동가 박찬익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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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외교의 선봉장이 되다 – 독립운동가 박찬익 선생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애국 열사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터.
경기도에서 태어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도 많다.
그중 이번 호에 소개할 인물은 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한 박찬익 선생이다.

글 이경희•사진 독립기념관

파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찬익 선생은 1900년대 초, 일제의 황무지 개척 요구안에 대한 반대투쟁에 참여하는 한편 흥화학교에 들어가 민족의식을 키웠다. 이후 고향 파주로 내려가 신민회에서 활동하며 황해도 등 서북지역에서 계몽운동을 꾸준히 펼친 것으로 알려진다.

1908년 4월 다시 서울로 가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해 1910년에 졸업한 그는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의사원으로 뽑히는 한편 대종교에 들어갔다. 1910년 2월에는 만주로 망명을 하고, 대종교 중심의 무장단체인 중광단에서 활동하며 필요한 무기 구입을 위해 중국과 교섭을 벌여 대단한 성과를 거두는 등 지린과 베이징, 연해주를 오가며 포교와 독립운동을 꾸준히 펼쳤다. 그리고 1919년 대한독립의군부 창설과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에 민족대표 39인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1921년 박찬익 선생은 상하이로 이동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정식으로 참여했다. 4월에는 경기도 대표로서 임시의 정원의 의원이 됐고, 7월에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 차장 대리로 뽑혀 정부의 외교임무를 전담했다.

 

박찬익 선생, 뒷줄 오른쪽(1884. 1.~1949. 3.)

임시정부의 외교 전문가

박찬익 선생은 안창호 선생과 같이 궁핍한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해 의연금을 모금했으며, 1921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9개국이 참가한 워싱턴 태평양회의에서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의 간사로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중국과의 외교교섭도 전담했다. 1922년 11월 부여족 통일회의에서 신민부가 탄생하자 중국 당국에 대한 교섭임무를 책임졌고, 1925년 10월 삼시협약 때문에 이강훈·신갑수 등이 체포되자 석방을 위해 나섰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이동녕·김구 선생을 도피시키기도 했다. 1933년 5월, 김구 선생과 같이 난징 중앙군관학교 구내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면담해 뤄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 한국인 청년을 입교시켜 군 간부를 키워 냈다.

1940년 봄, 그는 광복군 창설을 위해 중국 정부와 교섭을 벌였는데, 그해 9월 17일 마침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군으로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토록 염원하던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들은 박찬익 선생은 환국한 뒤 외교 업무를 맡는 동시에 동포들을 귀국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박찬익 선생은 광복군 창설이나 좌우합작, 정부요인 보호와 그 가족의 생계 문제 해결,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끌어낸 일 등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없어서는 안 될 외교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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