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구국의 신념으로 행동하다
독립운동가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
글 이경희
학자 집안의 막내아들,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신익희 선생은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조선 시대 판서를 지낸 신단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등 학자 집안의 면면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한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조국의 독립을 꿈꾸는 열혈 청년이었던 그는 조국의 유학생들과 함께 학우회를 만들었고 평의회장과 회장 등 간부직을 역임했으며 기관지인 <학지광>을 발간하는 등 꾸준히 학생운동을 펼쳤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해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의 비교헌법 담당 교수가 됐다.신 선생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데는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원칙 발표가 기폭제가 됐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가로서 중국 만주와 베이징 등을 오가면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책이 됐고, 안으로는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법에 대해 의논을 하며 3·1운동의 도화선을 댕기는 데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런 그가 상해로 건너 가 장장 26년간의 망명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19년 3월의 일이다.
군사행동을 주장한 행동파 정치인
상하이에서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일본유학생친목단체를 조직했고, 대한민국임시헌법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임시정부 초대 대의원과 내무차관을 지냈다. 이후 내무총장, 법무총장, 외무부장 등을 맡았으며 국무원 비서실장과 의정원 부의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신 선생은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군사행동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한국 청년을 모아 군대 조직을 만들기를 시도하고, 중국 혁명군과 연계해 한·중 합작에 의한 군사행동을 추진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군사력을 동원하려 했다.
광복이 되자 귀국한 그는 임시정부와 노선을 달리해 이승만과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대통령으로 뽑힌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됐다. 그러나 권력 연장을 위해 불법을 자행한 이승만에게서 민심이 등을 돌리자, 1955년 장면·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해 1956년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그가 선거유세를 위해 전주로 이동하다가 뇌출혈로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근현대사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남한산성에 있는 그의 동상에는 ‘民主爲到 同等樂域, 민주주의의 길은 함께 즐거운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