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일제에 맞서다 – 독립운동가 산재(山齋) 조병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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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일제에 맞서다
독립운동가 산재(山齋) 조병세 선생

조선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순탄한 인생을 걸을 수도 있었던 조병세 선생은 결코 편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청춘과 노년을 다 바쳐 헌신했다. 마지막까지 굳세었던 그의 인생을 들여다본다.

글 이도희 · 사진 예술의전당 ·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평군 문화관광, 시흥문화원

한평생 조국에 충성한 관료

1827년 노론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난 조병세 선생은 지방관인 아버지 덕에 26세 때 벼슬을 받아 나랏일을 시작하게 됐다.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하는 사관을 맡은 선생은 1864년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암행어사, 대사헌, 공조·예조·이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893년에는 좌의정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 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일제의 침략이 가중돼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선생은 돌연 가평으로 떠났다.

이후 국왕의 고문인 특진관 등 관직에 다시 임명되기도 했으나 정계와는 거리를 두고 주로 가평에 머물렀다. 그러다 1896년에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시무 19조를 상소하고, 1900년 재입궐해 국정 개혁의 필요성을 외쳤다.나라를 향한 선생의 충애(忠愛)는 끝이 없었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79세의 노쇠한 몸을 이끌고 상경해 을사5적의 처형을 수차례 요구했다.

조병세 선생(趙秉世, 1827. 6. 2. ~ 1905. 12. 1.)

조선을 울린 충정공

당시 여러 독립운동가가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5적 처형을 주장했으나 고종 황제는 묵묵부답이었다.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상소를 올렸고, 일본군에 의해 연금되고 풀려나기를 반복하다 가평 시골집으로 강제 추방되고 말았다.

이후 가평에서 지내던 선생은 민영환의 자결 소식에 다시 상경해 항쟁을 시도한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1905년 12월 1일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전국 동포는 내가 죽는 것을 슬퍼하지말고 각자 분발하여 나라를 도와서 우리 독립의 기초를 길러 나라가 망한 부끄러움을 씻어낸다면 나는 비록 구천지하에서나마 춤추며 기뻐할 터이다.”

선생의 부고를 들은 국민들은 모두 슬픔에 잠겼고, 1,000여 명이 조문을 갔다. 고종 황제 또한 황태자를 보내 특별한 예를 갖춰 장례를 지내게 했고, 그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선생의 죽음에 온 나라가 애도를 표했다.

이후에도 선생의 생애는 길이길이 기억돼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고 1995년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그가 을사늑약 무효와 5적 처단을 주장하며 남긴 말은 어록비로 제작돼 현재까지 그 강직한 기세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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