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민중의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 안재홍
21세의 나이에 독립에 대한 뜻을 세우고 1919년부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27년간 9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를 정도로 민중의 세상을 열기 위한 애국활동을 펼쳤다.
통합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고군분투한 독립운동가 안재홍 선생을 만나본다.
글 이미진•참조 사단법인 민세 안재홍 선생기념사업회, 경기메모리, 위키백과
‘민중의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다
선생은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에서 1891년 11월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남달리 뛰어났던 선생은 17세 때 황성기독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해 정치와 철학 등 신학문을 배웠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자 선생은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1911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해 조만식·송진우·장덕수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을 향해 차
츰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때 선생이 직접 자신에게 붙인 호가 민세(民世)로, ‘민중의 세상’이란 뜻이다.
‘필봉’으로 일제에 대항한 광복 전후 대표적 언론인
1919년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선생은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대한민국 청년외교단 비밀결사단체에 가담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3년의 옥고를 치르지만, 이후 젊은 시절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낼 정도로 선생의 독립활동은 멈추질 않았다.
1924년 시대일보 논설기자로 입사했다가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주필 겸 사장을 지낸 선생은 논설을 통해 일제가 선전하는 문화정치의 실상이 무단정치와 다를 바 없음을 비판했다. 1932년 조선일보 발행인에서 물러날 때까지 확인된 것만 약 1,450편이다. 특히 1925년 4월 조선기자대회에서 부의장으로 피선되기도 한 선생의 필봉은 경이적이라 할 만하다.
이후 선생은 애국계몽운동인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며 활동하다가 8개월간 복역했다. 1936년 다시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다가 적발돼 2년간 투옥됐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간 투옥됐다.
통합민족국가를 꿈꾼 민족운동가
광복 후 선생은 여운형이 결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돼 활동을 전개하다 중도우파를 주창한 것과 달리 건준에 좌파 세력이 대거 참여하자 탈퇴했다. 그리고 1946년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1947년 남조선과도정부의 정부수반 겸 민정장관을 거쳐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활동했다. 그러나 그해 9월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납북돼 재북평화통일추진협의회 최고위원으로 있다가 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별세(향년 75세)했다.
정부는 국권 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9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국가보훈처에서는 2002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 생가는 1992년 경기도 향토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돼,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