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양성에 앞장선 임시정부 요인 규운 윤기섭(尹琦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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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양성에 앞장선 임시정부 요인
규운 윤기섭(尹琦燮)

호는 규운이며, 경기도 파주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독립군 양성기관이었던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고,광복 전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독립을 위해 힘쓴 선생의 구국 활동을 살펴본다.

글 이미진•참조 국가보훈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교육을 통한 구국 활동의 시작 

윤기섭 선생은 1887년 4월 4일 경기도 파주에서 조선 말기 명문가 윤기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가 출신에 걸맞게 어린 시절부터 문중의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배울 수 있던 그는 서울 보성학교에 입학한 후 190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부임해 1909년 5월부터 1911년 5월까지 만 2년간 교사로 재직하면서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때부터 교육을 통한 선생의 구국 활동이 본격 시작됐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양성 전념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생은 1911년 8월 서간도로 망명한다. 그곳에서 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한인 자치기관 경학사 설립과 더불어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 창립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하여 10여 년간 학감과 교장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해 낸다. 그 수가 무려 3천 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1920년 2월 선생은 3·1운동으로 독립 열기가 뜨거워지자 이를 독립전쟁으로 수렴하기 위해 임시국민대회를 발기하고, 임시정부에 독립전쟁을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상하이로 향했다. 2월 말께 상하이에 도착한 선생은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을 만나 ‘군사에 관한 건의안’을 통해 결단을 촉구했다. 하지만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로 서간도 독립군들 대부분이 러시아로 이동하게 되고, 임시정부 해체에 대한 의견이 제기되면서 선생은 상하이에서 독립 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5년까지 선생은 임시정부 국무원과 군무장 등으로 활약하는 한편 1935년 민족혁명당이 조직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선생은 1943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부 차장에 임명됐으며, 1944년 6월에는 생활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돼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에 관한 일들을 관장했다.

마지막까지 임시정부 가족 귀국 도맡아 처리 

광복 이후 선생은 마지막까지 교민들의 귀국을 위한 일들을 처리하고 1946년 4월 말이 돼서야 귀국했다. 그리고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서 지내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의원으로 당선됐지만 6·25전쟁 당시 납북돼 북한에서 향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선생은 납북이라는 이유로 냉전시대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가 1989년에서야 공이 인정돼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다. 그의 기념비는 지난 8월 14일 서울 불광동 생가 터 인근 물빛공원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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