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편 외세의 침략에 맞서 함락되지 않은 ‘남한산성’


외세의 침략에 맞서 함락되지 않은 ‘남한산성’
적이 임진강을 건넜으므로,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행렬은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한 명이 지켜서 100명을 물리친다는 지리의 노른자위이기는 했으나 반대로 갇히면 뚫 기가 어려워서 멀리 도모할 수 없고,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갈 수 없으므로 시간과 더불어 말라 가는 곳이기도 했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임금은 선택해야 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 김훈 <남한산성> 中 에서

위기 상황을 이겨내고 독립성과 자주성을 쟁취해 낸 ‘국난극복 의지’의 상징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위기의 순간마다 격전의 현장이 됐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 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은 이후인 인조 2년(1624)의 일이다. 17세기에 극동지역에서 발달한 변화된 축성 기술 의 양상을 반영하면서 방어적 군사 공학 기술의 총체를 구현하고 있다.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수많은 사람이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덕에 적이 쉽게 공략할 수 없어 한민족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자리하기도 한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적지 않은 시련에도 2,000여 년을 꿋꿋하게 버텨온 남한산성에서 함께 버티며 나라를 지켜온 우리 조상들의 국 난극복 정신과 의지를 본받아 경기도의회는 코로나19를 비롯한 다양한 재난 상황을 적극적으로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정책을 마련 하고 있다.

자연지형의 이점을 그대로 살린 천혜의 요새

긴 세월 꿋꿋하게 버텨온 남한산성은 아름답다. 봄에는 동문과 북문 인근 계곡의 야생화, 여름에는 푸른 소나무밭의 녹음,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 겨울에는 성벽과 소나무 위에 쌓인 하얀 눈 덕에 언제 찾아도 눈이 즐겁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남한산성은 길다. 청량산, 연주봉, 망월봉, 벌봉 등을 연결해 쌓은 본성 둘레만 7,545m이고 3개 외성과 5개 옹성까지 포함하면 12㎞가 넘는다. 사실 이렇게 남한산성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하루가 모자란다. 자동차로 남한산성 주차장까지 편하게 올라가 성벽과 성안을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 매번 다르게 성벽과 성안 및 성에 이르는 등산로 등으로 나누어 여러 번 가면 새롭고 다양한 멋을 보여주는 남한산성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지리적으로 남한산성은 분지를 둘러싸고있는 성곽이다. 둘레가 12㎞에 이를 정도로 넓은 분지로, 성안에 우물이 85개나 있어 식수는 물론 농사짓는 데도 충분한 덕에 유사시 군사적·정치적·행정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왕조는 물론 이를 보필할 백성들도 함께 대피할 수 있었다.
차를 이용해 산성로터리까지 올라오면 일종의 예비 궁궐로 임금이 한양을 떠나 머무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남한산성행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행궁이 전국에 20곳 넘게 있었는데, 그중 남한산성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둔 유일한 행궁으로 한남루·외행전·내행전·좌승당·이의정·정전·영녕전 등이 자연환경과 어우러지며 더욱 멋스러운 자태를 뽐낸다.
또 산성 내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수어장대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를 의미하는데,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곳에 장대가 있었다. 이 가운데 남한산성의 주산인 청량산 위에 있는 서장대가 바로 수어장대다. ‘임금을 지키는 곳’이라는 뜻으로,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며진 건물이다. 기존 네 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수어장대는 해발 453m에 자리하고 있어서 이곳에 오르면 성 내부와 서울 잠실을 비롯한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다만 11월 25일까지는 정비공사로 인해 관람이 어려운 상황이니, 그 이후에 방문하는 편이 좋다.

성곽을 따라 걸으며 선조의 숨결을 느끼다

수어장대를 나와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서문이 나온다. 남한산성은 성곽을 따라 걷는 둘레길이 안쪽과 바깥쪽으로 따로 나 있어 서로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남한산성의 성곽을 유심히 살펴보면 돌의 종류나 성곽을 쌓은 모습이 제각기 다르다. 남한산성이 어느 한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백제 온조왕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랜 세월 조금씩 증축돼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는 증거다. 시대는 다르지만 체계적으로 견고하게 쌓인 성곽을 걷노라면 수천, 수백 년 전 우리의 선조들이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정성을 들여 하나하나 차곡차곡 정교하게 쌓는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며 숭고한 감사의 마음이 가슴 가득 차 오른다.
서문에서 성벽을 따라 조금 더 북쪽으로 걸어가면 연주봉옹성이 나온다. 옹성은 ‘항아리 모양의 성’이란 뜻으로 본성의 방어가 취약한 곳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쌓는 것인데, 연주봉은 남한산성 중 가장 북쪽 봉우리라 적을 감시하기에 적당하다.
남한산성에는 연주봉 외에도 남1·2·3옹성과 신지옹성 등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다.
연주봉옹성과 서문 사이에는 암문이 있다. 남한산성에 있는 총 16개의 암문 중 하나다. 암문은 적이 성을 포위할 경우 눈에 띄지 않게 바깥과 연결하는 통로다. 성벽 산책을 하면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암문을 나갔다 들어오는 경험도 해볼 만하다.
남한산성에는 서문인 우익문 외에도 동문인 좌익문, 남문인 지화문, 북문인 전승문이 있다. 남한산성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형태로 4대 문이 모두 비슷하고, 성문 문루는 물론 성벽 위의 기와도 모두 우리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중 남문이 왕이 남한산성을 드나들 때주로 이용하던 정문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갈 때도 남문을 이용했다. 특히 남문과 동문 사이의 성벽은 사시사철 각기 다른 멋을 자랑하는 경치로 남한산성을 찾는 이들의 발길을 사로잡곤 한다.
직접 가 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숨겨진 백미가 가득한 남한산성. 선선한 가을 남한산성을 방문해 그 색다른 매력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의원의 시선

“국난을 이겨낸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겠습니다”

남한산성은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며 나라와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증거가 담긴 위대한 경기도의 문화유산입니다. 멀리는 삼국시대 신라를 도왔던 당나라가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지배야욕을 드러내자 한강 유역을 방어하며 나라를 지켰고, 고려시대에 몽골의 1차 침입에 광주군민들이 몽골군의 공격을 방어하며 물리쳤으며, 조선시대에도 5군영의 하나인 수어청이 주둔하며 유사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성을 지켜주는 보장지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이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을미사변 이후 봉기한 경기의병의 의병투쟁 거점과 3·1운동을 비롯한 항일운동의 근거지도 남한산성이었습니다.
경기도의회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선조들의 노력을 본받아 최근까지 이어진 일본의 경제침탈로부터 우리의 경제 주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과 함께 앞으로도 코로나19의 국난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안기권 의원(더불어민주당, 광주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