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집 Ⅱ 우리 역사 속 소띠 위인을 만나다


[1397년 정축년(丁丑年)생]
세종대왕

세종대왕 통치기는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것은 물론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안정을 이룬 시기로 평가받는다. 600년 조선왕조의 기틀이 되는 유교정치에 필요한 제도를 정비하고,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국토를 확장하고,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정책을 주도하고 이끌어 낸 분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1397년 소의 해에 태어났다. 우리 민족의 가장 훌륭한 문화유산 중 하나로 꼽히는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직접 주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와 더불어 통치에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을 위해 유망한 소장 학자들을 집현전에 채용했고, 그곳에서 배출된 수많은 인적 자원은 세종대왕 시대에 문화와 정치의 발전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큰 발전이 이뤄졌다. 특히 천문대와 천문관측 기기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 등으로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물론 측우기로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게 되면서 농업 분야에서 괄목할 진전이 이뤄졌다. 이 외에도 세종대왕은 인쇄술, 무기, 의약,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무엇보다 그의 시대가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사·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흔들리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신념을 관철하는 의지, 신분을 가리지 않은 인재 등용 등 세종대왕의 통치철학과 됨됨이가 안정을 이룬 시대적 여건과 조화를 이뤘던 덕분이다

[1745년 을축년(乙丑年)생]
김홍도

단원 김홍도는 그의 스승 강세황으로부터 “어릴 적부터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니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당대의 뛰어난 문인화가였던 스승에게서 어렸을 적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은 김홍도는 갓 스물을 넘긴 1765년에 영조 축하연의 병풍을 그린 데 이어 1773년 영조의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릴 만큼 당대 최고의 화원으로 인정받았다. 또 1781년에는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종6품의 벼슬을 하사받는 등 당시 중인 신분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단원은 50세를 넘어서며 한국 특유의 정서가 담긴 풍경을 소재로 하는 산수화를 즐겨 그렸다. 탁월한 공간 구성,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묵선의 강조, 부드럽고 조용한 담채 효과는 단원만의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이다. 특히 그는 풍속화로 큰 인상을 남겼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을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구도와 풍부한 해학을 담아 화폭으로 표현한 것. 그가 이룩한 화풍은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에게 영향을 끼쳐 한국화의 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1889년 기축년(己丑年)생]
김좌진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인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 김좌진 장군은 1889년생 소띠다. 홍성의 부유한 명문대가에서 태어난 그는 15세이던 1904년,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 30여 명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전답을 무상으로 분배하며 ‘노비해방’을 단행한다. 어린 나이에 계몽운동에 눈을 뜨고 이를 실행한 것이다.
그는 집안 노비들이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한 후 서울로 올라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다. 어려서부터 <삼국지>와 <수호지>를 통달할 정도로 읽고 무술연마에 꾸준히 노력하는 등 군사학에 관심을 가졌던 터라 정식으로 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을사늑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의 상황을 체감한 장군은 다시 홍성에 돌아와 호명학교를 설립해 젊고 유능한 100여 명의 학생에게 계몽운동을 전개하며 국권회복을 교육했다. 또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독립운동에 투신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먼저 국내에서 대한광복회에 소속돼 군자금을 모집하던 장군은 만주로 넘어가 무관학교의 경험을 살려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한다.
특히 1920년 독립군을 공격하려 만주로 출병한 일본군 1,300여 명을 청산리에서 맞아 600여 명의 부하로 섬멸하며 막대한 피해를 안기고, 일본군의 간도 출병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에도 신민부를 창설하고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정예사관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는 등 독립군 양성에 전념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