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문화 지킴이

일상의 흥겨움을 담다
김권수 경기소리 휘모리잡가 보유자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1-1호)

유독 일상이 고단하다고 느끼는 날, 우리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찾는다. 잠시 현실에서 나와 마음껏 웃고 놀며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다. 휘모리 잡가는 흥겨운 리듬과 발칙한 가사로 서민의 삶을 응원하는 소리다. 경쾌한 휘모리잡가를 듣고 있으면, 힘들었던 하루도 어느새 희극이 된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1-1호 휘모리잡가 보유자 김권수 선생은 소리로 많은 사람의 오늘을 위로하고 있다.

휘몰아치는 서민의 소리

경기 지방에서 전승되는 경기소리는 느린 장단으로 부르는 ‘경기긴잡가’와 빨리 몰아서 부르는 ‘휘몰이 잡가’로 분류된다. 여기서 ‘휘몰이’는 말 그대로 휘몰아친다는 뜻이다. 리듬을 빠르게 가져가는 음악적 특성을 드러낸다. ‘잡가’는 일반 대중의 노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대부가 즐기던 음악은 정‘ 가’, 대중이 부르던 노래는 ‘잡가’로 구분한다. 휘모리잡가는 일반 대중이 즐기는 빠르고 흥겨운 노래다.
“휘모리잡가는 휘몰아서 촘촘히 몰아서 빠른 템포로 나아가는 소리입니다. 그 안에 풍자와 해학을 담은 가사를 붙여서 이야기를 전하죠. 지금으로 치면 랩과 같은 음악이에요. 재미있는 이야기와 빠른 템포가 아주 매력적인 소리입니다.” 휘모리잡가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맹꽁이타령>의 내용은 맹꽁이가 몇 명의 남편을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다. 이처럼 우화 등 재미있는 이야기를 활용해 현실을 비꼬고, 희화화한다. “내용 안에 들어가 보면 과장도 많고,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아요. 예를 들어 <바위타령> 가사 중에 밥을 지었는데, 그 안에 해태 한 쌍이 앉아 있다는 내용이 있어요. 익살스럽고 재미있는 소리죠.”

절정에서 울리는 흥겨움

휘모리잡가는 특히 일제강점기에 많이 불렀다고 전해진다. 어두운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휘모리잡가를 들으며 힘든 하루를 이겨냈다고 한다. 흥겨운 가락과 노랫말은 역경의 시절, 서민들의 애환과 삶을 위로했다.
“휘모리잡가는 1870년에서 1905년 사이에 시작된 소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전에 삼패기생이나 전문 소리꾼에 의해 불렸어요. 예전에는 공연에서 휘모리잡가를 맨 마지막에 불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엔딩을 장식하는 무대라고 할 수 있어요. 흥겨움을 절정으로 치닫게 하는 겁니다.”
공연의 모든 흥을 담아 마지막에 펼쳐지는 휘모리잡가. 서민의 일상이 힘겨울수록 휘모리잡가는 더 세게 몰아친다. 같이 웃고 떠들고 놀자고…. 관객은 휘몰아치는 소리에 이끌려 남은 모든 힘을 다해 흥겨움을 즐긴다. 그렇게 하루의 피로를 날려 버린다.
“휘모리잡가는 빠르고 어려운 소리입니다. 빠른 템포에 맞춰 부르기 때문에 기교도 많이 필요하죠. 공연의 모든 흥겨움을 담아서 마무리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빠른 가락으로 노래해야 해요. 절정의 흥겨움 속에서 노랫말에 담긴 내용도 전달해야 하니까, 고난도의 노래라고 할 수 있죠.”

마음에 이끌려 온 고양시

김권수 선생은 경기도 안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사당의 발상지인 안성에는 놀이문화가 발달해 있었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소리를 접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고는 그저 소리가 좋아서 이끌리듯이 소리를 시작하게 됐다.
“어릴 때부터 민속놀이나 소리를 듣고 보고 자랐습니다. 동네에서 농악단들이 농악기를 치고 다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죠. 저는 그 소리가 참 좋았습니다. 심지어 상엿소리가 너무 좋아서 상여꾼들을 따라 산에까지 따라간 적도 있었어요.”
김권수 선생이 고양시에 오게 된 것도 마음이 끌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1993년 전문 소리꾼으로 활동하면서 처음 고양시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다. 이후 30여 년 동안 고양시를 떠나지 않고 있다.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고양시에 온 것은 아닙니다. 전문소리꾼이 되면서 고양시에 학원을 차렸어요. 그때 이상하게 고양시에 그렇게 마음이 가더라고요. 인연 같은 것이죠. 이곳으로 와서 고양시 지역에서 전해지는 설화로 소리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소리극 <한씨미녀>가 있습니다.”

문화재 보유자의 역할

한 분야에서 경지에 이르려면 피나는 노력이 필수다. 김권수 선생에게 “연습하며 힘든 적은 없었냐”고 물었더니,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소리를 할 때면 설렌다”고 말했다.
“공연하며 부대끼는 사람에게는 상처를 받지만, 소리 자체는 전혀 질리지 않아요. 지금도 공연하면 설레요. 앞으로의 목표도 뚜렷합니다. 휘모리잡가를 비롯해 국악을 하는 동료와 후배들이 편하게 활동하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문화재라는 칭호는 하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제 역할은 전통 소리를 널리 알리고, 후학을 위해 기틀을 마련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