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옛이야기(성남시 편)

가실고개 서낭당 성남에 내려오는 설화

구석기시대부터 탄천을 중심으로 발달한 성남시는

백제시대에는 도읍지로서 한 나라의 중심이기도 했다.

세월만큼 전해 오는 이야기도 많은 성남시의 설화와 전설을 찾아 떠나보자.

구지회 사진 및 출처 경기도메모리, 경기문화재단


은혜 갚은 두꺼비

두껍능산

옛날 분당에 마음씨 착한 한 처녀가 살고 있었다. 집안의 자식이라고는 처녀가 유일했기에 부모님을 도와 집안일은 물론 농사일까지 하며 열심히 살았다. 어느 날 처녀는 농사일을 하다가 집으로 먼저 돌아와 저녁밥을 짓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한참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두꺼비 한 마리가 들어와 처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처녀가 밥상을 차릴 때까지도 두꺼비는 계속 앉아서 처녀를 바라보았다. 이 모습을 본 처녀는 식구대로 밥을 뜨고, 남은 밥 한 덩어리를 두꺼비에게 주었다. “네가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이 밥을 먹으렴” 하면서 두꺼비에게 밥을 주었고, 두꺼비는 처녀가 주는 밥을 받아먹었다. 두꺼비는 ‘오랫동안 많은 집을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마음씨 착한 처녀는 처음이구나’ 하고 그 뒤로도 처녀의 집을 찾아왔다. 때마다 처녀는 두꺼비에게 밥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할 나이가 된 처녀는 이웃 마을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두꺼비는 그동안 밥을 챙겨 준 처녀의 정성을 잊지 못해 처녀가 시집가는 곳까지 따라갔다. 그런데 처녀가 시집간 곳은 가난한 집이었다. 집이 낡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두꺼비는 ‘은혜를 갚아야겠다’ 생각했다. 그러고는 매일 밤마다 처녀의 시댁 지붕에서 떨어지는 온갖 벌레를 잡아주었다. 하루는 두꺼비가 처녀의 집 천장에서 이상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가만히 있으면 누군가가 그 빛이 나는 것에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두꺼비는 분명히 처녀를 잡아먹으려고 온 괴물이라고 여기고, 그 괴물을 향해 붉은 빛을 뿜기 시작했다. 두꺼비의 강한 빛 때문에 괴물은 떨어져 죽었다. 그 이상한 빛을 내는 괴물은 천년 묵은 지네였다. 결국 두꺼비가 지네를 죽여 처녀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러나 처녀가 두꺼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기도 전에 기력이 다한 두꺼비는 그만 죽고 말았다.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처녀의 은혜를 죽음으로 갚은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은 온 마을에 퍼지고, 마을 사람들은 두꺼비를 묻어주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때부터 두꺼비를 묻어준 곳을 ‘두껍능산’이라고 불렀다. 성남시 분당동에 위치했던 야트막한 산인 두껍능산은 분당신도시 개발로 없어졌으며, 현재 그 자리에 분당동행정복지센터가 자리해 있다.

두꺼비는 천년 묵은 지네를 향해 붉은빛을 뿜기 시작했다

은혜갚은두꺼비ⓒ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 산신제 ⓒ성남시


성남시 마을 이름의 유래

 

깃든 이야기 많은 구미동

구미동(九美洞) 이름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많다. 탄천이 굽이쳐 흐르는 곳에 마을이 위치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국이라는 설도 있으며, 아홉 성씨가 각각 아홉 개의 취락을 이루어 살아 구성리(九姓里)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가 있던 봇들마을

삼국시대 신라가 화랑을 동원해 이 지역에 저수시설인 보(洑)를 만든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왕자가 잠든 수진동

수진동(壽進洞)은 근처 영장산에 영면한 세종대왕의 일곱 번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의 묘소를 관리하는 수진궁(壽進宮)이 이 지역에 있었던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름을 되찾은 산운마을

일제강점기에 운중동이라 부르던 이 지역은 본디 학고개라는 뜻에서 메두루미, 산운매 등으로 불렀다. 그 옛 이름을 되찾기 위해 ‘산운마을’이라 이름 붙였다.

 

도적을 피해 새로 흥한 마을 시흥동

청계산 일대 도적 떼를 피해 이주해 온 주민들이 ‘새로 흥할 수 있는 마을(始興洞)’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백제의 수도를 점지하다

온조왕과 남한산 산신령

도읍지를 고민하던 백제의 시조로 전해지는 온조왕의 꿈에 남한산 산신령이 나타나 남한산 아래에 도읍을 정하라고 일러주었다. 온조왕은 하남위례성(지금의 서울)으로 도읍을 정하였고, 국력은 날로 융성했다. 산신령은 다시 한번 꿈에 나타나 “나를 믿어줘 고맙다. 언젠가 도읍지를 옮길 때까지는 내가 힘써 보살펴 주겠노라”라고 말했다. 이후 온조왕은 봄가을마다 산신제를 지냈고, 산신령의 가호아래 백제는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누렸다. 산신제는 남한산성을 찾는 산악인들의 안전을 기원하고 남한산성을 알리기 위한 행사로 현대까지 성남시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산신령이 나타나 남한산 아래에 도읍을 정하라고 했다


옛 슬픈 사랑 이야기 서린

가실고개 서낭당

분당에서 오포면 신현리로 넘어가는 길목인 불곡산(성덕산)의 옛 이름은 가실고개다. 삼국시대 백제에 가실 총각과 설 처녀가 이 가실고개에 살고 있었다. 둘은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는데, 어느 날 설 처녀의 아픈 아버지가 2년간 노역을 하게 되었다. 소식을 들은 가실은 대신 자원해 노역을 떠났는데, 가실이 일하던 곳에 이웃 나라가 쳐들어와 10년 동안 고향 땅에 돌아올 수 없었다. 그 사이 설 처녀의 아버지는 자책하다 세상을 떠났고, 설 처녀는 다른 이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뒤늦게 고향으로 돌아와 상황을 알게 된 가실은 자결하고 말았고, 설 처녀 또한 통곡하다 그의 뒤를 따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두 사람을 함께 묻어주었고, 시간이 흘러 무덤가에 자란 나무에 사람들이 돌을 하나둘 얹으면서 서낭당이 되었다고 한다. 서낭당은 열병합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없어졌다.

 

고향으로 돌아와 설 처녀가 이미 시집을 간 사실을 알게 된 가실은 자결했고,

설 처녀는 통곡하다 그의 뒤를 따랐다

산신도

불곡산 ⓒ성남시

 


산신령의 선물

여수동의 쌀바위

백제시대, 현재 성남시 여수동인 가차곡 율리에 착하디착한 부부가 살았다. 몇 해 동안 흉년이 계속되던 어느 날 일이었다. 남루한 노인이 부부의 집에 찾아와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간청했다. 부부는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노인을 집 안에 들이고 밥을 지어 먹이긴 했지만, ‘이제 꼼짝없이 굶어 죽는구나’ 걱정하며 잠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부부의 꿈에 영장산 산신령이 나타나 말하길, “내가 너희를 시험해 본 바, 마음씨가 고우니 선물을 주마. 내일 아침 일찍 바위틈에 가보아라” 했다.

이튿날 잠이 깬 부부는 산신령의 말대로 새벽같이 윽암산에 올라 바위틈을 살폈다. 그러자 바위틈에는 부부가 하루 먹을 만큼의 쌀이 뿜어 나와 있었고, 이튿날에도, 그 이튿날에도 딱 그만큼의 쌀이 있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흉년이 계속되는데도 노부부가 굶어 죽지 않는 것을 수상하게 여기던 마을 사람들이 뒤를 부부의 뒤를 밟으니 바위틈 조그만 구멍에서 쌀이 쏟아져 나오는데 부부가 먹을 양의 쌀이 나오고는 그치므로 바위 구멍을 더 크게 만들자고 간청했다. 노부부는 신령님의 선물이어서 바위에 해를 입히면 다 같이 큰 화를 입는다며 거절했지만,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마을 사람들의 요청도 점차 거세져 어쩔 수 없이 정으로 바위 구멍을 넓히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별안간 천지를 뒤흔들 만한 굉음과 함께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쌀은 온데간데없고 부서진 돌가루만 쏟아져 있었다. 노부부와 마을 사람들은 같이 굶주리는 신세가 되어 모두 죽고 말았다.

 

 


성남시 마을 이름의 유래

 

판자 다리가 있던 판교동

운중천에 넓은 판자(板)로 놓은 다리(橋)가 있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잣나무가 많던 백현마을

백현마을이란 ‘잣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뜻의 ‘잿고개’를 한자어로 풀이한 이름이다.

 

밤나무가 많던 율동

과거 이 지역에는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이에 ‘밤 율(栗)’ 자를 써 율동이 되었다.

 

햇볕 따스한 마을 양지동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있다고 해 ‘양지말’이라고 부르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어르신을 위한 큰글씨

 

은혜 갚은 두꺼비

마음씨 고운 한 처녀에게 매일 밥을 얻어먹던 두꺼비가 처녀를 노리는 천년 묵은 지네에 맞서 혈투를 벌이다 죽고 말았다.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두꺼비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그 무덤 자리를 두껍능산이라 불렀다.

 

가실고개 서낭당

백제시대 가실고개에 장래를 약속한 가실 총각과 설 처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설 처녀의 아픈 아버지가 노역을 떠날 위기에 처하자, 가실 총각이 대신 자원했다. 가실 총각은 10년 동안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고, 그 사이 설 처녀는 다른 집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뒤늦게 설 처녀의 소식을 들은 가실 총각은 자결했고, 설 처녀 또한 뒤를 따랐다. 이후 그들의 무덤 자리는 서낭당이 되었다.

 

여수동과 쌀바위

몇 해 동안 흉년이 계속되던 어느 날, 백제시대 어느 마을의 착한 부부가 식량이 부족한 데도 손님을 맞아 귀하게 대접했다. 부부의 마음씨에 감복한 산신령이 틈에서 끊임없이 쌀이 나오는 바위를 알려주었다. 마을사람들이 이를 알고 욕심을 부려 바위 구멍을 넓히려 하자 바위는 부서졌고, 모두 굶주려 죽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