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편 다산 정약용의 부국강병을 향한 꿈…

다산 정약용의 부국강병을 향한 꿈…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체는 꾸준히 운동한다”라고 했다. 요·순은 꾸준히 운동하는 천체처럼 잠시도 쉬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우(禹), 직(稷), 설(契), 익(益), 고요(皐陶) 등 신하들 역시 맹렬한 활동으로 임금의 손발이나 귀와 눈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신의 지위에 있는 자들은 당장 ‘대체(大體)를 틀어잡는다’는 한마디만 가지고 세상만사를 해결하려 하니 이는 잘못이 아닌가!

– 「경세유표」 서문에서

규제 개혁을 통한 경기도의 지속 발전 가치 추구

‘실학사상의 집대성’이라는 위대한 대업을 이룬 조선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 그가 「경세유표」를 저술한 것은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있어 현재의 실행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나열하여 나라를 새롭게 개혁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행정기구와 법제 및 경제 제도를 대폭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한 정약용의 위민 정신을 이어 경기도의회는 도민 생활에 밀접한 각종 규제 개혁을 주창하며 모두가 잘사는 경기도 실현에 앞장서고 있다.

정약용의 가르침이 있는 ‘다산유적지’를 찾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 6. 16. ~ 1836. 2. 22.)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래리 마재마을)에서 태어났다. 두물머리에서 10분이면 닿는 이곳은 현재 팔당호의 이른 아침 물안개와 남한강변 만추의 풍광이 일품으로 꼽힌다. 유년 시절 정약용의 눈에도 집 앞으로는 두강(斗江)이 흐르고, 동남쪽과 북쪽으로는 운길산과 검단산·예봉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두른 풍광이었다. 언제나 그리운 고향을 떠올리면 산과 강이 떠오르는…. 다산의 실학사상은 이곳에서 차츰 움트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난 정약용은 10세에 경사(經史)를 읽기 시작하고, 16세부터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를 읽은 것으로 전해진다. 28세에 과거시험인 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하며 벼슬길로 나간 정약용은 명나라에서 전해진 천주교, 즉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서양사상으로 인식된 ‘서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서학에 심취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관료 생활은 순탄치 못한 길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성균관 유생 시절 정조의 눈에 든 정약용은 좌절하지 않고 당시 갖은 폐단의 원흉이 된 고마고(雇馬庫)를 개혁하고, 가좌부(家坐簿) 제도를 개선했으며, 홍역 치료법을 모아 의학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편찬해 냈다. 거중기를 발명해 한강에 배다리를 놓고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과학자로서의 업적도 쌓았다.
다산문화거리에서 이어지는 다산유적지에는 정약용의 이와 같은 치적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 모여 있다. 거중기와 녹로 등 시대를 앞서간 그의 업적을 전시해 놓은 다산기념관, 수많은 저서와 함께 그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한 다산문화관, 그리고 그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생가 여유당과 묘 등이 있다.


실학으로 일구고자 한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

정약용은 20대 초반에 서학을 가까이한 까닭에 천주교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오해로 여러 번 고초를 겪는다. 결국엔 순조 원년에 일어난 천주교 탄압사건에 엮여 1801년부터 1818년까지 전라도 강진에서 기나긴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 고통의 세월에서 오매불망하던 고향에 돌아와 숨을 거둘 때까지 18년을 합해 오직 위민 정신에 입각해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책을 저술한다.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는 왜 그가 일생의 힘을 다해 글을 지었는지를 후세에 전하는 말씀이 새겨져 있다.

육경(六經) 사서(四書)로써 자신의 심신을 수양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니, 이로써 본(本)과 말(末)을 갖추었다.
– <자찬묘지명>에서
‘1표 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는 그를 대표하는 명저다. 그중 1817년에 쓰인 「경세유표」에 대해 위당 정인보는 “선생의 평생 대저(大著)는 「경세유표」라는 하나의 책이다”고 말한 바 있다. 비록 미완의 책이지만, 정약용은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실사구시의 학문 태도를 강조하며 당시 세제와 군제, 관제, 신분 및 과거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를 재검토해서 개혁하고자 했다. 곧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인간의 신체로 비교하면 모발(毛髮)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 이 어찌 충신 지사들이 수수방관할 바이겠는가?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새로운 나라로 만들어 내자.
– 「경세유표」 제1관 천관 이조에서

그가 가슴에 새긴 정치사상의 근본은 백성을 사랑하는, 즉 애민에 있었다. 이듬해 편찬한 「목민심서」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재물을 절약해 쓰는 데 있고 절용(節用)하는 근본은 검소한 데 있다. 검소해야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해야 백성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검소하게 하는 것은 목민관이 된 자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 「목민심서」 서문에서
한편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자 했으며, 국가의 지속 발전을 추구한 정약용의 삶과 업적은 유네스코의 이념과 일치하는 바가 인정돼 그는 ‘2012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
다산유적지를 나와 바로 왼편에서 만날 수 있는 ‘실학박물관’에서는 다시 한번 정약용의 업적을 살필 수 있다. 잘못된 관행에 경종을 울리며 조선의 변화, 나아가 부국강병을 일구고자 한 그의 가르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가 사랑한 남양주, 그의 꿈이 드리운 이곳을 언제고 또다시 찾아와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싶다.

 

 

의원의 시선

“다산의 가르침 되새기며 지역 교육 격차 해소할 것”

성리학이 관념성과 추상성에 치우치는 것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 사실적이고 경험적인 것에서 진리를 추구하려는 학문을 실학이라 합니다. 그 실학을 완성한 이가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입니다. 이에 그치지 않은 다산 선생은 민목지직 교민이이(民牧之職 敎民而已)라 하여 일찍이 교육의 중요성을 간파했습니다. 지역의 생활정치를 행하는 자로서 진심으로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다산 선생의 유배지에서의 제자 교육은 선생의 방대한 저술만큼이나 빛나는 대목입니다.
선생의 교육 방식은 단계별 교육, 전공별 교육, 맞춤형 교육, 실전형 교육, 토론형 교육, 집체형 교육 등 세분화하여 설명하고 있어 현재의 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양주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저는 다산의 학문과 삶에 매료된지 오래입니다. 다산의 고장에서 산다는 자부심 또한 남다를 수밖에 없으며 지역의 정치인으로서 마음가짐이 매사에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기도 의원으로서 경기도민 모두가 잘살게 하는 것이 제가 바라는 최고의 지향점입니다. 특히 경기도의회 제1교육위원회 위원으로서 새삼 다산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지역 간 교육 격차를 해소하고 실효성 중심으로 도민 편익과 행복을 위해 노력해 나갈 것을 약속합니다.

김경근 의원(더불어민주당, 남양주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