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안산을 “서울과 가깝고 생선과 소금이 풍부해 여러 대에 이어 사는 사대부 집들이 많다”라고 소개했습니다.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김수온 또한 “땅은 큰 바다에 접했고, 또 산에 의지했다”는 말로 안산의 지리적 특성을 노래했습니다. ‘큰 바다’에 인접해 교역이 활발하고 물산이 풍부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자연환경과 사회·경제적 배경 덕분에 안산에는 일찍부터 학문과 예술의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고려시대 덕종·정종·문종의 외향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을 때에는 장항구현이라고 불렸습니다. 신라가 장악한 후에는 장구군으로 바뀌었고, 940년 안산현으로 개칭됐습니다. 이후 김긍필의 아들 김은부가 고려 현종의 장인이 되면서 안산은 덕종·정종·문종의 외향이 돼 1308년 안산군으로 승격됩니다. 이를 계기로 향교가 설치됐고 지방관이 파견됐습니다. 학문적 토양이 비로소 마련된 셈입니다.
서해안 방어 기지이자 교역 중심지
안산은 중국 무역로인 남양만의 관문에 있어 서해를 통한 적의 침탈을 방어하는 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현재 별망성이 있는 초지량에 조선시대 수군기지를 두어 해안 방어에 주력했던 것도 이곳이 왜구가 가장 먼저 발을 딛는 지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서해 주요 교역로였던 덕분에 조선시대에는 궁중에 해산물을 진상하는 안산어소가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학문과 예술이 꽃피는 도시
1748년 표암 강세황은 처남인 유경용을 위해 지상편도를 그립니다. 붓을 들었다 떼었다 하며 건물이나 난간 등의 윤곽선을 꼬불꼬불하게 그려 건물의 생동감이 유난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 속의 건물이 바로 청문당입니다. 서책 1만 권이 비치된 조선시대 만권당 중 하나인 이곳은 조선 후기 남인들의 학문적 기반이 된 곳입니다. 실학을 집대성한 성호 이익 선생과의 교류의 장이었던 동시에 단원 김홍도가 표암에게 그림을 배우며 화가로 성장해 나간 곳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조화로운 도시, 안산
[안산읍성 및 관아지]
[별망성지]
[성호공원]
[최용신기념관]
[대부해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