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에는 남한산성의 축조에 관한 한 전설이 전해집니다. 인조 때 광주 유수로 있던 이서는 이인고와 승려 벽암에게 성을 나누어 쌓게 했습니다. 북쪽 공사를 맡은 벽암은 기일 안에 축성을 끝낸 반면 이인고는 견고하게 성을 쌓느라 기일 안에 공사를 끝내지 못하고, 간신들에 의해 주색에 빠져 공사를 게을리한다 누명을 쓰게 됩니다. 이를 사실로 믿은 이서가 이인고를 참수하자 어디선가 매 한 마리가 날아와 뜰 앞 바위에 앉았다 사라졌습니다. 수어장대 앞 바위에는 매의 발자국 흔적이 남아 있다고 전해집니다.
천험의 요새로 불리는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습니다. 삼국시대 때는 한강과 더불어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고, 고려시대 때는 몽고군을 맞아 나라를 지키는 보루로서의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의 12만 대군을 맞아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곳이고, 일제강점기 때는 수많은 항일투쟁운동이 벌어진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습니다.
왕실 도자기의 역사가 깃든 곳
조선시대 광주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관요가 있던 지역입니다. 도자기 제작에 필요한 땔나무를 구하기 쉬웠고, 한강과 경안천의 수로를 통해 서울까지 도자기를 이동하기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관장하던 사옹원 분원의 가마터가 300여 곳에 이릅니다. 땔나무를 구하기 위해 숲이 울창한 지역을 찾아 분원을 이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략 10년을 주기로 이설하다 18세기 중반 이후 현재 분원백자자료관이 있는 분원리에 분원이 고정 설치됐습니다.
땅이 넓은 고을, 광주
광주산맥의 밑단부에 위치해 구릉성 산지가 발달했습니다. 경안천 등 남한강의 지류를 따라 평야가 이어져 4,000여 년 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한강변에 있는 남종면의 검천리와 오포면의 양벌리 등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됐고, 상평동·궁평동·쌍동리 등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 등이 보다 넓게 발견됐습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으며 940년부터 ‘땅이 넓은 고을’이란 뜻의 광주로 불렸습니다.
역사와 생태자원의 보고, 광주
[남한산성]
[분원도요지]
[천진암]
[곤지암도자공원]
[경안천습지생태공원]
[팔당물안개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