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옛이야기(안양시 편)

극락정토 일컫는 의미…
안양시에 얽힌 옛이야기

안양은 오밀조밀 이야기가 많은 도시다. 수리산 찬우물 전설, 삼막사 남녀근석, 망해암 등 안양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수리산 찬우물 ⓒ안양시

정리 유현경

 

안양 명칭의 유래가 된
안양사 이야기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고려 태조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 등의 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다섯 가지 빛으로 채색된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 밑에서 능정 (能正)이란 스님을 만났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그 자리에 안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안양이란 불교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를 일컫는다. 안양이란 명칭은 이 안양사에서 비롯됐다.

수리산 찬우물 ⓒ안양지역도시기록연구소

관련 명소 안양사

 

“정성이 갸륵하니 물을 주겠노라. 당장 내려가서 너희 논밭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우물을 파도록 하여라.”

 

착한 부부에게 하늘이 내린 선물
수리산 찬우물 전설

수리산 줄기에 자리한 많은 우물 가운데 찬우물은 수질이 가장 좋은 데다 수량이 일정한 것이 특징이다. 수리산은 호랑이가 누워 있는 형세로 찬우물은 호랑이의 가슴 부분에 해당해 호랑이 젖줄처럼 그 샘물이 마르지 않았다. 아주 먼 옛날에 몹시 가난한 부부가 살았다. 산등성이의 척박한 논밭에서 거두는 곡식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여러 해 가뭄이 들었고,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짓는 부부는 초근목피로 연명하기조차 힘겹게 되었다. 결국 부부는 마지막 남은 곡식을 털어 음식을 마련하고 수리산 정상에 올라 며칠 밤낮을 간절히 빌었다. 그러다 깜박 졸았는데, 꿈속에 수리산 산신령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정성이 갸륵하니 물을 주겠노라. 당장 내려가서 너희 논밭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우물을 파도록 하여라.” 잠에서 깬 부부는 그 길로 산을 내려와 신령의 말대로 하자 가물었는데도 엄청난 양의 물이 펑펑 솟아나지 않는가. 부부는 무릎을 꿇고 신령님께 감사를 드린 다음 정성을 다하여 이 우물을 관리하였다. 그 후로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짓게 되어 오래지 않아 근동에 이름난 알부자가 되었다. 여름에도 우물 주변에 얼음이 얼 정도로 몹시 차고 마르는 법이 없어 ‘찬우물’로 불리게 되었고, 지금도 냉천쉼터공원 안에 냉천약수터라는 이름으로 사랑받고 있다.

 

관련 명소 냉천쉼터공원

 

 

안양시 마을 이름의 유래

학이 울다 갔다는 ‘명학동

조선 인조 때 좌의정 심기원이 부친 묘를 쓰려고 땅을 팠는데, 돌 밑에 학 두 마리가 있었다. 한 마리는 오미산 뒤로 날아갔고, 한 마리는 바위에 날아와 앉더니 슬피 울다 날아갔다. 그 후 학이 울었던 바위라고 해 ‘명학바위’라 칭했고, 마을도 ‘명학동’이 되었다.

꽃과 창고가 있었다는 ‘꽃챙이’

조선 말까지 미곡 창고와 철쭉밭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초에 벚나무 등을 식재하면서 각종 꽃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 후 꽃과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고 해 ‘꽃챙이’라 불렸다.

선녀가 살 것 같은 ‘선녀골’

‘선녀골’은 곤두레미고개 밑에 있던 마을로, 골짜기가 아름답고 수리산 낙맥인 데다 습한 곳이라 안개가 많이 생겨 선녀가 사는 고을 같다고 해 이름 붙었다.

뛰어 달아나야 비를 피할 수 있는 ‘달안동’

이 마을은 1944년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활주로 공사를 할 만큼 지역이 넓어 비가 오면 가릴 것이 없어 삿갓을 쓰고 달아나야 비를 피할 수 있다고 해 ‘삿갓들’ 또는 ‘다라니’라고 불렸다. ‘섬마을’이라고도 했다.

망해암 ⓒ경기관광공사

자손을 원하는 사람들의 기도처
삼막사 남녀근석

옛날 어느 고을에 덕망 높은 선비가 살았다. 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자식 복이 없어 외동아들뿐이었다. “가문을 이을 사람은 오로지 너뿐이니 각별히 몸조심하여야 한다.” 세월이 흘러 아들은 과거에 급제하였고, 한 규수를 선택해 혼례를 치렀다. 부부는 금실이 좋았으나 혼인한 지 4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자 크게 근심했다. 기다리다 못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집안의 대가 끊어지려나 보다. 씨받이를 들여서라도 대를 이어야겠다.” 아들은 아내를 생각하니 가엾고, 부모님과 조상께는 죄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느 날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홀연히 한 할머니가 나타나 “너희 걱정을 알고 있다. 관악산 기슭에 가보면 남녀근석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기도 중에 내려오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것이다” 하고 사라졌다. 꿈이 예사롭지 않다고 여긴 부부는 남녀근석을 찾아가 움막을 짓고 기도를 드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정성껏 기도를 드리자 아내에게 태기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아들을 낳았고, 부러울 것 없이 잘 살게 되었다. 또한 자손이 번창하자 소문은 이웃에게 널리 퍼졌다. 이후 자식을 원하는 사람이 이 바위를 만지면서 출산과 일가의 번영, 무병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이후 4월 초파일과 칠월칠석 등에는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관련 명물 삼막사 남녀근석

 

“가문을 이을 사람은 오로지 너뿐이니 각별히 몸조심하여야 한다.”

안양 삼막사 명부전 ⓒ국가문화유산포털
안양 삼막사 남녀근석 ⓒ국가문화유산포털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배를 구한
망해암

조선 세종 때 삼남 지방에서 국가 세금으로 받은 곡물을 가득 실은 여러 척의 배가 인천 앞바다를 지났다. 팔미도 근해를 지날 무렵, 심한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다. 매우 절박한 상황에서 선원들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에 돌연 뱃머리에 한 스님이 나타났다. “모두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내 말을 잘 들으라” 하며 선원들을 진정시키고 배를 인도해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풍랑이 잠잠해지자 한 선원이 “대사님은 어느 절에 사십니까?” 하고 묻자 “관악산 망해암에 있노라” 하며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이후 선원들이 한강까지 무사히 도달한 뒤 생명의 은인인 신통한 스님을 찾아 망해암에 올라가 보았지만 스님은 계시지 않았고, 스님과 용모가 흡사한 부처님이 법당 안에 모셔져 있었다. 그들은 그제야 부처님의 크신 자비와 신통력으로 자신들이 살아났음을 깨닫고 곧 왕에게 상소해 이 사실을 알렸다. 이를 가상히 여긴 임금은 매년 한 섬씩 공양미를 불전에 올리게 했고, 이는 400여 년간 계속되었다.

관련 명물 망해암

망해암 석조여래입상 ⓒ국가문화유산포털

 

어르신을 위한 큰글씨

안양시의 전설과 설화

마르지 않는 찬우물 이야기

호랑이가 누워 있는 형세의 수리산. 찬우물은 호랑이의 가슴 부분에 해당해 호랑이 젖줄처럼 마르지 않았다.

안양 지명의 유래가 된 사찰

태조 왕건이 삼성산을 지나다 신비한 구름 밑에서 스님을 만났고, 극락정토의 뜻을 담아 안양사를 창건했다.

자손 번영의 소원을 들어주는 바위

꿈속 이야기를 듣고 자식 없는 부부가 남녀근석에 기도해 소원을 이루었다. 이후 사람들의 기도처가 되었다.